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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이 감각에 중독될지도 몰랐다.

 

“아치, 맡겨둔 일은 끝냈니?”

“네. 마무리 서류 작성 후 보고할 예정이었습니다.”

“날뛰는 것도 좋지만, 그 힘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할 거야. 언제나 명심하고 있으렴.”

“네.”

 

여느 때와 같이 맑고 푸른 바다. 제 주군을 위해 일하던 아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화라는 단어만큼 자신과 먼 단어는 없겠지만, 이 고요하고 잔잔한 분위기는 가랑비에 옷 젖듯 자신을 적셔갔다. 시켈러 님의 명을 따라 처리하는 일, 보고하러 찾아가는 위티라 님의 집무실, 만나면 곧바로 으르렁대나 같은 적을 두곤 누구보다 합이 잘 맞는 파세톤. 이곳은 자신의 집이다.

간혹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오는 위티라 님을 마주할 때면 시간이 멈추고 심장이 멈춘 듯, 스스로를 자제하기도 힘겨울 지경이었다. 자신은 이 위대한 고래족의 가장 뛰어난 전사로서 많은 전투에 엄중한 책임이 있었다. 때문에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제가 품은 불경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 될 일이었다.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나, 주군의 손길이 닿으면 절로 붉어지는 목덜미와 귓가를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옅게 웃어주시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다는 욕망 또한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반짝이는 물결의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아름답고 거대한 혹등고래에 떨려오는 제 손을 부여잡으며 자신을 잠식해오는 감정에 몸을 맡겼다. 검은 등에 자리한 거대한 훈장과, 그 훈장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 기쁜 듯 바다 위로 튀어 오르는 몸체와 위대한 고래족의 후계자임을 증명해내는 꼬리지느러미의 모양까지. 환희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아치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은 이 감각에게서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맞서 싸울 수도 없을 것이다. 그저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제 운명을 기다리는 작은 존재일 뿐이다.

 

다만, 다만….

 

 

 

 

“누님, 경애하고 있습니다.”

“아치?”

“사모하고 있습니다. 흠모하고 있습니다.”

 

옅은 바다가 담긴 눈동자에 작은 물결이 일었다. 당혹스러움에 일렁이는 눈빛을 채 다잡기도 전, 연달아 그의 말이 들려왔다.

 

“위티라 님, 누님. 저를 받아주시지 않아도 좋으니, 지금처럼 곁에만 둬 주십시오.”

“...아치.”

 

이제야? 그보다 혼자 생각하고 통보하는 거야? 기다리려 했더니 안 되겠네.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짧게 호흡을 내뱉던 위티라가 그를 바라본 채로 멈춰 섰다.

 

“아치,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니.”

“그저 제 마음을 말씀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끝까지 숨기고 싶었으나 갈수록 커지는 마음에 이성조차 조절하지 못하는 상태로 내뱉는 것 보다는 지금 전하는 것이 제 단념에도, 이후의 일처리에도 편리하다 여겼습니다. 일정에 방해를 드려 죄송합니다.”

“아치.”

“예?”

“누가 단념을 하라 하였지?”

“무슨….”

“네가 모시게 될 주군이 누구지?”

“…….”

“네가 모시고 있는 주군이 아닌 모시게 될 주군 말이다.”

“위티라 님 이십니다.”

“그래, 너는 나의 수하이자 나의 것이다. 어째서 혼자 결정해버리는 것이지? 내 얘기를 듣기도 전에 말이다.”

“하지만, 이 불경한 마음은….”

“나는 네 마음이 불경하다 한 적이 없는데.”

“…….”

“도리어 조금 기껍네. 이런 면엔 둔한 네가 언제 고백하나 싶었거든. 내가 먼저 잡아먹어야 하나 싶었는데.”

“네…?”

 

조금 풀어진 얼굴과 말투로 작게 웃어 보인 위티라가 아치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놀라 저도 모르게 뒤로 도망치던 아치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오며, 힘을 주어 그 상체까지 자신 쪽으로 당겼다. 맑고 청량한 눈이 제 눈높이까지 내려온 그 얼굴을 만족스레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리곤, 지척에서 속삭여왔다.

 

“수줍어하던 모습도 귀여웠지만 역시 눈앞에서 보고 싶네.”

“네? 네?”

“고장 났니?”

“네?”

“우선 지금은 곧 회의가 있으니 다시 만나 얘기하자꾸나. 밤에 내 침실로 오렴.”

“네?”

“아, 오늘 회의에서 넌 내 것이라 알릴 테니 알아두고.”

“네?”

 

고장 난 듯 같은 말만 반복하던 아치를 뒤로한 채 복도 저 편으로 멀어지던 위티라가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있다가 다시 뒤돌아 아치를 향해 왔다. 아직도 허리를 숙인 자세 그대로 넋이 나가있는 아치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해준 뒤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모습에 숨을 멈춘 채 서있던 아치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아치는 시끄러운 제 머릿속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아치 열 명 정도가 싸우고 있는 듯 동시다발적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게 뭐지? 무슨 일이지? 누님이 받아주신 건가? 누님은 진작 아셨는데 내가 말하길 기다리셨다고? 누님을 기다리게 하다니 아치 이 무능한, 눈치도 없는, 아니 정말 알고 계셨다고? 내가 그렇게 티를 냈다고? 그럼 요새 보고를 받으실 때 간혹 웃으시던 이유도? 이건 너무 간 생각인가? 그보다 밤에 침실로 오라니 내 잠옷 중에 주군의 심미안에 맞을 옷이 있던가? 제복을 입고 가야하나? 잠시만, 회의에서 알리시겠다니 그게 무슨 얘기지? 어? 어? 비련의 주인공과 같은 자세로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고 있던 아치가 문득 제 이마를 만졌다. 어? 어? 방금, 나 방금 이마에 위티라 님이, 누님이, 어? 어??? 이젠 목부터 이마까지 새빨개진 채 어버버거리던 아치를, 지나가던 중인 파세톤이 발견하곤 어이없다는 듯 물어왔다.

 

“야 양아치 뭐하냐?”

“어?”

“거기 드러누워서 뭐하는데.”

“어?”

“아니 얘 왜 이래?”

“어?”

“됐다. 누님하고 해야 할 얘기 있는데 어디 계신지 아냐? 너 누님 위치라면 다 알잖아.”

“어???”

“뭐야 진짜 왜 이래.”

 

다시 언급된 위티라의 이름에 이젠 손끝까지 빨개진 아치가 제 입을 틀어막곤 파세톤을 지나쳐 복도를 달려 건물에서 뛰쳐나왔다. 제 안식처인 왕궁의 뒤쪽 공터까지 달려와 나무에 기대듯 쓰러진 아치가 과거를 떠올렸다.

 

‘아치, 난 왕이 될 거야.’

‘왕이 되면 좋은 거예요?’

‘응.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두렵기도 하지만, 난 왕이 되어서 우리 고래족과 내 가족, 아치 너를 지켜낼 거야.’

‘왕 하면 그런 거예요? 왕 멋있다!’

‘그렇지? 그러니까 내가 왕이 되면 넌 내 측근이 되어주는 거야.’

‘측근…?’

‘가까이에서 왕을 지키고 도와주는 사람을 말하는 거야.’

‘그럼 저 누나 측근 할래!’

‘약속한 거다?’

‘응. 새끼손가락 꼭꼭 걸어요.’

 

둘 모두 조막만하던 시절, 이 공터에서 함께한 추억이었다. 어쩌면 자신은 그 때부터 위티라 님에게 종속되었을 것이다. 자신은 두려운 부분이 있어도 왕이 되어 모두를 지키겠다던 그 반짝거리는 주군의 모습이, 그 날의 시원하게 들어차던 공기가, 마주쳤던 당당함에 가득 찬 눈동자가. 그 날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의 이유와 목적이 되었다.

 

아치는 입술이 닿았던 제 이마와 저를 다정히 바라보던 눈빛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이 감각에 중독될지도 몰랐다. 행복에 잠식해 죽는다면 이런 감각일 것이다. 이후 일을 하는 중에도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이 날지도 모른다. 더 이상은 누님의 앞에서 붉어지는 얼굴과 떨리는 손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누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바닥만 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누님은 혼낸 후 저를 달래주실 것이고, 붉어진 얼굴을 보며 귀엽다는 듯 웃고 떨리는 손을 맞잡아주실 것이다. 바닥만 보는 제 얼굴을 들어올려 자신을 마주보게 할 것이다. 제 주군은 그런 분이시다.

이윽고 빠듯하게 채워진 제 마음이 무거워 잔디밭에 털썩 드러누운 아치는 팔로 얼굴을 가리며 잠을 청했다. 감정을 정리하고, 생각 또한 정돈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일이 되면 고래족의 거의 모든 이가 저와 주군의 사이를 알게 될 테고, 그러면 또 퍼부어지는 질문에 정신이 없어질 것이다. 그 전에 모든 걸 가라앉히고 쉴 시간이 필요했다. 내일은 힘겨운 날이 되겠군, 하는 생각과 달리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자신은 이제 완벽한 주군의 측근이 된 것이다. 저만큼 주군과 가까운 사람이 없다는 것. 그 것에서 오는 만족감. 절로 새어나오는 잔웃음을 삼키며 그는 잠에 들고, 위티라가 들어간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고래족의 평화로운 어느 날 이야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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