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한은 꿈을 꾸었다. 광활한 밤하늘, 반짝이는 별빛, 그리고 자신의 손을 마주잡으며 미소를 짓는 아이. 그 순간들이 하나의 모션그래픽처럼 꿈에 나타났다. 꿈속에서의 시간은 그 경계가 무의미해서 모든 것이 멈춰있었다. 그곳에서는 어린 최한의 시간만이 흘러가고 있었다.
뚜, 뚜, 뚜- 하고 규칙적이게 울리는 알람소리와 함께 최한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가가 촉촉했다. 최한은 눈가에 흐르던 눈물을 닦아내고는 알람시계를 꺼버렸다. 매번 그랬다. 언제나 그 꿈을 꾸고 날 때면 최한은 울고 있었다. 그리고 최한은 여느 때와 같이 매번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최한은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었다. 그의 유년시절 기억은 불완전하다. 의사들은 입을 모아 이것이 충격으로 인한 기억상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한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그 꿈은 최한의 사라진 일부의 기억이라는 것을 최한은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한은 매번 자신의 사라진 기억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사람들은 누구나 그럴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연속적으로 꿈을 통해 나타날 가능성은 얼마나 되겠는가. 최한은 이 기이한 현상의 원인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자신이 왜 그리 슬펐는가에 대해서도. 최한은 언제나 그런 생각들 따위를 하며 등교를 했다. 그런 최한의 일상에는 약간의 변화가 찾아왔었는데. 어째, 교실이 평소와 다르게 어수선한 분위기가 있었다.
“무슨 일이야?”
”한 학년 위로 어떤 선배가 전학 왔는데 잘생겼다나봐”
여자애들이 옹기종기 모여 그 선배의 얼굴에 대해 좋아라하는 것을 보았다. 전학 온 선배가 잘생겼다는 것은 또래 소녀들에게 재밌는 화재였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그 선배에 대한 여자아이들의 이야기가 들리니, 최한은 자연스레 그 선배의 외모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장밋빛의 붉은 머리카락과 암갈색 눈동자에 흰 피부. 2학년이며 케일 헤니투스라는 이름까지. 하교시간이 될 때 까지 학교는 그 선배의 이야기로 가득했다.
최한은 밖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들을 보았다. 어쩐지 아까부터 습기가 차더라니. 최한의 집은 학교에서 약간 먼 곳에 위치했으며 오늘따라 지갑도, 우산도 챙기지 않았다. 게다가 최한의 친구들은 이미 하교한지 오래였다. 부모님은 요새 바쁘셔서 매번 늦게 돌아오셨다. 최한은 임시방편으로 가방을 우산 삼고는 빗물로 질척거리는 보도를 달렸다. 그것도 잠시, 번화가를 지나간 최한의 가방은 점점 젖어가 안에 있는 노트들을 약간 적셔버렸다. 최한은 풀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에서 노트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의와 하의가 각각 반 정도 젖은 최한은 머리를 탈탈 털며 고개를 푹 숙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최한의 앞에서 나긋한 미성이 들렸다.
“너 우리 학교 학생이지? 배 안고파?”
최한은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았다. 붉은 머리카락. 흑갈색 눈동자. 그 사람은 무척이나 신비롭고 기묘했다.
“케일 헤니투스?”
최한이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날 알고 있어?”
“명찰에 쓰여 있어요. 2학년 선배 맞죠?”
“어, 응... 맞아”
케일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최한은 차마 학교 쉬는 시간마다 들리는 소문으로 알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최한의 배가 꼬르륵대었다.
“내가 밥 사줄게.”
“......감사합니다.”
최한은 눈치 없는 제 배가 미웠고, 너무나도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찾아가 숨고 싶었다. 최한은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밥을 먹게 되었다. 케일은 최한에게 자신의 우산 옆자리를 넘겨주었고, 최한은 아직 가시지 않은 창피함에 딱딱하게 몸이 굳어 철통기계처럼 부자연스럽게 케일의 옆자리로 갔다. 그리고 그는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몸이 경직되어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받았다.
“헤니투스 선배님. 감사합니다. 사주신 스테이크 비싼 것 같아 보이는데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아, 나 돈 많아. 정 불편하면 한동안 등하교 시간에 나랑 어울려주는 걸로 밥값 해. 그리고 다음부터는 케일선배라고 편하게 불러”
최한은 경어를 사용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밖을 나오니 폭포처럼 쏟아졌던 소나기는 어디로 갔는지 여름의 맑고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렇게 케일 일행은 해산했다.
최한은 또 다시 꿈을 꾸었다. 어제와 똑같은 꿈이었다. 최한은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아이를 보았다. 붉은 머리? 최한은 반사적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어째서일까. 그 아이를 보자마자 케일선배가 떠오른 이유는. 최한은 복잡한 마음에 머리를 헝클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른 아침의, 그리고 여름의 푸릇함이 잘 아우러진 하늘을 보며 최한은 등교를 했다.
“왔어? 일찍 오네. 최한”
“안녕하세요. 케일 선배. 선배도 일찍 오시네요. 저 이름 알려준 적 없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최한이라고 명찰에 쓰여 있는데?”
“아.”
최한은 묘한 데자뷰와 함께 콩트를 찍는 느낌을 받았다. 둘은 학년이 달랐기에 다시 헤어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케일선배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케일 선배를 언급하며 최한도 몇 번 거론된다는 것이다. 최한은 억울했다. 그냥 등하교 한번 한 것일 뿐인데 애들이 그를 보고는 소곤대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최한은 같이 다니는 친구 무리에게서 케일 선배랑 친하냐고, 무슨 사이냐고 질문을 받기도 했다. 최한은 이에 대해서 그냥 어쩌다가 친해졌을 뿐이라고 하며 함구했다. 최한은 이 오버스러운 상황이 피곤했다. 하교시간이 다가오자 최한은 누구보다 빠르게 교실을 나왔다. 교문 앞에서 케일을 기다리던 최한은 근처 아이스크림 가계에서 소다 맛 아이스크림과 녹차 맛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최한, 교문에 있었어? 그건 또 뭐야?”
“아, 선배. 아이스크림이에요”
최한은 자신이 밥값을 잊지 않았다고 말하며 케일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었다.
“혹시 소다 맛 싫어하세요?”
“아니, 레모네이드 같은 것만 아니면 되”
두 사람은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까먹었다. 어제의 빗물의 흔적이 있어 바지가 약간 축축해졌지만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최한은 소다 맛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케일 바라보았다. 최한을 그를 보면서 자꾸 꿈이 생각났다.
“선배. 저희 예전에 본 적 있어요?”
충동적으로 물은 최한에 케일이 움직임을 멈췄다. 아니, 없어. 부정의 뜻에 최한은 물어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그 뒤로 정적이 따라왔다.
“어, 그만 갈까?”
최한은 어제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케일에 긴장된 것이 풀렸다.
최한은 케일을 만난 뒤로 몇 번 더 그 꿈을 꾸었다. 몇 주에 한번 간격으로 꾸던 꿈이었다. 하지만 요즘 그 빈도가 늘어 최한은 매번 그 꿈을 꿔야 했다. 계속되는 이상현상에 최한은 스트레스가 쌓여만 갔다. 그 꿈이 무어라고, 자꾸 자신을 놓지 못하는 것인가. 최한은 잃어버린 기억이 약 올라 끙끙거렸다.
“최한. 오늘 밤에 나랑 별구경 가지 않을래?”
“별구경이요? 시간 나니까 괜찮아요.”
그리하여 최한은 케일과 밤에 만나게 되었다. 매번 보던 교복이 아니라 사복차림의 케일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흰색 실크 셔츠에 검정 정장바지라니, 최한은 고급스럽게 생긴 케일과 그 옷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최한은 케일이 누가 보면 중세시대의 귀족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둘은 가로등이 촘촘히 세워진 공원 벤치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봤다. 지금은 건물 빛 때문에 별이 잘 보이지 않아 꿈 속 광경처럼 광명한 별을 보는 것은 어려운데 오늘따라 별이 잘 보였다. 케일선배는 그래서 별구경을 가자고 했던 것이었나. 최한은 고개를 돌려 케일을 바라보았다. 케일은 웃고 있었다. 어느새 자신의 손을 마주잡고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최한은 그런 케일을 모습에 별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케일만을 보았다. 꿈속의 그 모습과 지금 이 순간이 겹쳐보였다. 최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케일은 최한 몰래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최한은 자신의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새로운 감정에 최한은 젖어가며 얼굴이 상기되었다. 두근거리는 제 고동소리를 들려왔다. 케일과 헤어지고 최한은 혼란스러운 마음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케일선배를 좋아하나? 나는 꿈속에 그 아이를 사랑했나? 케일선배는 그 아이가 맞았나?
최한은 침소에 들기 전 까지도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최한은 그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최한. 왜 멍하니 있어”
“아, 케일선배!”
최한이 평소와 다르게 밝게 웃으며 케일을 맞이했다. 양 볼을 붉게 물들이고서는 케일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오늘은 어디가요?”
오늘따라 적극적인 최한의 모습은 헤실거리는 대형견 같았다. 별구경을 가고 난 후 몇일 동안 조용했던 최한이었다. 오늘따라 활기차 보이는 최한에 케일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자 최한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케일은 그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간도 잠시, 케일은 갑자기 진중하게 말했다.
“최한. 있잖아. 사정이 생겨서 더 이상 못 만날 것 같아.”
최한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최한은 고개를 숙였다. 무거운 분위기가 둘의 공간을 지배했다.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선배는 왜 자꾸 떠나려고 하세요? 옛날에도 그랬잖아요. 말해 봐. 선배는 대체 정체가 뭐예요?”
“언제부터. 기억났어?”
“별구경을 갔을 때요. 그때도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최한은 놀란 케일을 보았다. 케일도 울음을 터뜨리는 최한을 보았다. 두 시선이 서로를 교차했다.
“선배. 저 선배를 좋아해요”
제 마음 속에 우겨넣었던 감정을 토해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처량했다.
“최한. 미안해. 나중에 만나.”
케일이 최한을 안았다.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최한에게 케일은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최한의 등을 토닥이는 케일을 최한은 세게 끌어안았다. 애처로운 울음이 멈추었을 때 그곳에는 최한 혼자만이 남겨져 있었다.
최한은 다음 날, 다시 학교로 갔다. 그곳에서는 케일 헤니투스가 없었고, 그 존재가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아무도 그를 몰랐다. 그날의 기억은 백일몽 같았다. 오직 최한만이 케일 헤니투스를 기억한다.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