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안타레스: 전갈자리의 α별의 고유명으로 항상 짙은 적색을 띤다.(네이버 두산백과)
거대한 전갈의 몸체에 걸터앉아 끓어오르는 모래먼지를 바라보던 케일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제 꿈 속, 김록수로 살던 곳보다 먼 미래인 듯 바스러진 건물의 형태와 광활한 사막이 그 시야를 채웠다. 실제 그곳이 어떠할지 자신은 알 수 없는 일이 되었으나 이 장소가 자신이 있던 차원이라 생각한 이유는, 그나마 흔적이 남아있던 한 건물의 안쪽이 매우 익숙한 구조였기 때문이다. 자신과, 팀장, 최정수가 함께한 바로 그 곳이었다.
‘김록수!‘
귓가에 아른거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모여드는 미간이 당혹스러웠다. 팀장과 정수는 행복할 것이다. 이 생애 동안 그들과 다시 만나는 것은 요원한 일이겠으나 죽음의 신을 통해 그들이 괴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
‘록수야.’
어째서 이 목소리들에 심장이 끝없이 조여오는지.
자신이 이 전갈을 마주한 것은 건물을 둘러보고 사막에 발을 디딘 후, 갑작스레 나타난 독사들과 싸우던 도중이었다. 높이는 3m가 넘어 보이고 크기는 자신의 스무 배가 넘는 듯한 육중한 몸체는 휘어진 꼬리로 독사들을 쳐내며 제게 다가왔다. 경계를 끌어올린 케일의 앞에 복종하듯 몸을 낮춘 채 기다리는 전갈에 케일은 당황을 금하지 못했으나, 어째선지 이 생물이 자신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알아채곤 조심히 그 단단한 등껍질에 올라탔다.
안정감 있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사막을 내지르는 녀석에 조금 더 편한 자세로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 케일은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바라봤다. 공해를 내뿜는 인간과 건물은 모두 사라진 듯한 이 공간엔 한 조각의 별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공해로 뒤덮인 세상인 탓일까? 아니면 이게 그저 한 줌의 꿈이기 때문? 의문에 답해줄 상대는 없었다.
한참을 달리던 고요한 사막의 한 가운데에는 오아시스가 있었다. 마치 그저 자연의 사막처럼 보이는 광경에 조심히 전갈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와 양손바닥을 모아 물을 떠올리자, 마셔도 괜찮은 물이라는 듯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던 전갈이 모래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장소를 이동하진 않고 밑으로만 내려간 모양인지 바로 근처에서 그 기운이 느껴졌고, 사막임에도 춥지 않은 밤에 생경한 기분을 느끼며 케일은 잠에 들었다.
아침이 찾아오고, 웅덩이에서 가볍게 세수를 하고 그 옆에 누워있자 거대 전갈이 다시 올라왔다. 갈 길이 바쁘다는 듯 제 쪽으로 등을 돌린 채 무언으로 재촉하는 모습에 다시 그 위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다시 끝없는 사막 횡단을 시작했다.
전갈의 등에 탄 채 오랜 시간 사막을 휘젓느라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도착한 곳은 모래폭풍이 지나간 듯 황폐해진 어느 거리. 다만 이 곳 또한 건물의 형태가 몇 남아있어 덩치가 큰 전갈은 그 사이를 편히 다니지 못했고, 잠시 크르륵하는 소리를 내니 땅 속에서 케일보다 두 세배 정도 큰 듯한 전갈들이 튀어나왔다. 이 거대 전갈의 어린 개체인 듯 케일을 향한 애정과 호기심을 숨기지 못한 채 케일의 주위를 돌던 작은 전갈이 이내 제 등에 케일을 태우곤, 거리 한 가운데 높고 아직 단단한 골격이 남아있는 건물을 타고 올랐다. 건물의 옥상에서 좀 더 움직여 구석부분에 그를 데려다놓고 가만히 있는 모습에 케일은 그래서 무엇을 원하는가 싶었고, 그러다 잠시 든 고개에 붉게 빛나는 한 별이 보였다. 달도 다른 별도 모두 보이지 않아 암흑뿐이던 하늘에 유일하게 홀로 뜬 별은 아지랑이를 흩트리며 사람을 홀리려는 듯 했고, 그 빛을 멀뚱히 바라보던 케일의 귓가로 소리가 들려왔다.
‘…록수야.’
‘김록수.’
“록수야.”
“…팀장?”
“김록수, 생일 축하해.”
“어?”
“오늘 생일이잖아. 11월 8일. 선물 자리에 올려뒀는데 또 바빠서 확인 못 했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돌아본 곳은 익숙하기 그지없는 사무실이었다. 알만하다는 듯 능글맞게 웃어 보이는 수혁의 모습과 놀리는 표정의 정수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꿈속의 꿈이라니 인셉션이야? 돌려볼 팽이라던가 있나?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며 발이 기억하는 제 자리를 찾아가자 고급스러운 검은빛의 포장지와 빨간 리본으로 포장된 손바닥 크기의 선물상자 하나, 화려한 노란 포장지에 연두빛 리본으로 묶인 선물상자 하나가 자신을 반겼다.
조심스레 만지작거리던 리본을 푸는 록수의 뒤에 서 있던 수혁이 장난스레 말했다.
“눈앞에서 푸는 건 조금 부끄러운데.”
“안됩니까?”
“풀어라, 풀어. 네 선물인데 뭐.”
“그러죠.”
그리고 안에 든 것은 고급스러운 벨벳 재질의 쥬얼리 상자로, 그 뚜껑을 여니 짙은 빛의 루비를 둘러싼 깔끔한 은테와 은색 줄의 목걸이가 보였다.
“웬 목걸입니까?”
“전갈자리의 알파성, 안타레스라고 하는 붉은 별인데, 네 눈 색이랑 닮아서 사왔어.”
“눈 색…? 제 눈은 검은색인데요?”
“아니지 록수야. 네 눈은 붉은색이야.”
“그럴리 없잖아요 팀ㅈ”
“내 선물은?”
재촉하듯 묻는 정수에 하려던 말을 입안으로 씹어 삼키며 정수의 선물을 만졌다. 사막에서 벗어났으나, 입 안에 모래가 가득 찬 느낌이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긴장한 손길로 리본을 풀어 내리자 화려한 금테와 세련되게 컷팅된 붉고 큰 보석이 박힌 브로치가 보였다.
“이런 건 왜?”
“연회에 하고 가야지 김록수.”
“그게 무슨 소리야.”
“넌 깔끔한 걸 좋아하지만 화려한 게 잘 받으니 액세서리라도 이런 거 하고 다녀.”
“너….”
““생일 축하해.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있을게.””
-허억
급히 숨을 들이키며 부드러운 침대에서 눈을 뜬 케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깨에 닿는 머리칼은 붉은 빛이고, 입은 잠옷 또한 부드러운 실크다. 이건 케일 헤니투스의 몸이다. 침대 바깥에 서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케일의 땀을 닦아주던 론이 시야에 들어오고, 케일은 물었다.
“…론, 지금이 몇 시지?”
“자정이 조금 넘었습니다. 악몽을 꾸시는 듯 해 깨워드렸는데 괜찮으신 겁니까 도련님?”
“악몽은 아니었어.”
“네? 하지만 땀을….”
“오늘이, 오늘이 며칠이지.”
“이제 막 11월 8일이 되었군요.”
“하, 그래. 11월 8일 말이지…?”
“예.”
제 귓가에 다시금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생일 축하해, 록수야.’
생일날에 악몽을 꾼다니, 아니 악몽은 아니지만 이런 꿈이라니. 죽음의 신의 장난인가? 아니면 그냥 나 혼자만의 꿈? 무의식? 여러 생각을 차곡차곡 쌓으며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린 케일이 무언갈 보곤 손을 멈췄다.
‘왜, 저게 여기에…?’
꿈속에서 두 사람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와 브로치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 진득한 시선을 느낀 론이 고개를 돌려 그것들을 보곤 말을 건넸다.
“주무시는 손에 꽉 쥐고 계시던 것들인데 혹 날카로운 부분에 손이 상하실까 저 위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뭐?”
“거래내역같은 걸 본 기억이 없는 물건들인데 언제 구매하신 겁니까?”
“…선물받았어.”
“네?”
“아냐. 오늘 있을 황궁의 연회에 저것들을 하고 갈 테니 어울리는 옷을 준비해줘.”
“알겠습니다.”
강제적으로 참가해야하는 연회가 아니니 오늘은 쉬며 서류작업이나 하겠다던 제 도련님이 갑자기 연회에 참가하겠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꿰뚫어 보겠다는 듯 그를 지긋이 바라보던 론이 알려줄 생각이 없는 듯 입을 꾹 다문 케일에 별 다른 말을 얹지는 않은 채 방에서 빠져나갔다.
‘무서운 할아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곤 테이블에 다가가 물건들을 바라보던 케일은 생각에 잠겼다. 역시 죽음의 신이 무언가를 한 건가? 하지만 이것을 전달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어째서 두 사람의 모습으로? 아니면 둘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을 전해준 것인가? 그 죽음의 신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내 신뢰도가 그 정도 수준이냐며 툴툴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으나 케일은 무시했다.
일단 잔뜩 흘린 땀을 씻어낼 필요가 있었고, 오후에 연회도 있으니 샤워부터 해야 했다. 론에게 말해두었음에도 브로치와 목걸이 둘 다 어울릴 연회복을 떠올리던 케일은 제복을 입은 채 연회에 참가하던 자신의 바뀐 모습에 놀랄 다른 귀족들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욕실의 문을 여는 케일의 등은 어쩐지 들뜬 모습이었다.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