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시끄러운 장터를 오가는 사람들의 사이로 케일이 지나갔다. 축제 기간이라 직접 오지는 않으려고 했건만 온이 눈을 반짝이는 바람에 너희끼리 갔다가 오라는 대답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라온과 홍의 손에 이끌려 나왔다. 나오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테라스에서 와인 따고 있었을 텐데. 케일은 하늘 위로 떠 있는 달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먹고 싶은 건 다 사.”
나중에 또 사러 나오기 귀찮으니까 살 수 있을 때 다 사란 심보였다. 그에 최한의 품에 안겨있던 온과 홍, 그리고 라온은 머뭇거리다가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들을 가리켰다. 그렇게 안에 들어가서 먹을 군것질거리는 점점 쌓이는 중이었다.
한밤중인데도 북적한 장터의 사람들을 피해 벽 쪽으로 붙어 이동하던 중이었다. 앞장서던 케일의 바로 옆 골목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걸 발견하고 눈빛이 날카로워진 최한이 곧장 무언가와 케일 사이로 달려들었다.
“뭐야?”
엉겁결에 최한이 넘긴 온과 홍을 안아 든 케일의 얼굴이 당황스럽게 일그러졌다. 시선을 돌렸지만 키 차이 덕분에 골목 안쪽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고개만 빼꼼 내밀어 골목의 상황을 살폈다.
“……최한.”
케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앞을 막아선 최한은 검을 날붙이를 붙들고 있었다. 그 날붙이의 주인을 본 케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한이 검을 뽑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상대가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케일님, 잠시 물러나 계세요.”
“……아니. 넌 손이나 지혈해.”
손수건을 휙 넘겨준 케일은 괜찮은데 라며 중얼거리는 최한을 뒤로 물렸다. 케일은 최한의 손에 피는커녕 생채기조차 나지 않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케일이 앞으로 나서자 아이는 몸을 움츠리며 무언가를 뒤로 숨겼다. 자세히 보니 아이는 둘이었다. 표정을 일그러뜨린 케일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먼저 말을 뱉은 건 두 아이 중 좀 더 커 보이는 아이였다.
“꼴에 귀족이라고 호위도 데리고 다니고. 팔자 좋다? 아주 충견이네.”
……애써 열린 케일의 입은 도로 닫혔다. 온의 또래나 될 법한 아이의 입이 단순 험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유일한 무기를 빼앗긴 아이의 입은 쉬지 않았다.
“거기 호위 아저씨. 그쪽도 얼마 못 가서 버려질걸? 귀족들은 이용 가치가 없으면 다 버리니까!”
시끄러운 장터의 소음에 묻히는 아이의 목소리가 케일과 최한에게는 또렷하게 들렸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 아이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한창 뛰어다니고 놀아야 할 시기인 것 같은데.
고민하는 케일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아이는 곧장 품 안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빼 들었다. 처음 덤빌 때 들고 있던 날붙이와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제 앞의 귀족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번에도 최한이 앞을 막아섰다. 검은 여전히 뽑지도 않은 상태였다. 단도를 맨손으로 붙잡은 그의 손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아이가 머뭇거리던 사이, 그는 그대로 단도를 뺏었다. 피가 흐르는 손은 케일의 손수건으로 대충 지혈하며 케일의 앞에서 물러났다. 왠지 칭찬을 바라는 눈길에 케일은 이마를 짚었다.
이젠 정말로 가진 무기가 없는 아이가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 골목은 막다른 길이었다. 최소한 도망갈 길은 만들어 두고 덤비던가. 이 행동이 충동적이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야.”
케일이 아이들을 불렀다. 언니로 보이는 아이가 움찔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밥 먹었냐?”
나름 용서해주겠다는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 옆의 더 어린아이가 허둥대다가 뒤따라 고개를 숙였다. 허리까지 접은 사과에 최한은 어설프게 웃었다.
“요양까지 와서 이런 습격을 받았는데. 당연히 사과 정도는 받아야지.”
케일은 고개를 주억이며 두 아이를 응시했다. 어린데 마르기까지 하니 뼈다귀가 따로 없었다. 툭 치면 괜히 뚝 부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케일은 괜히 쓸데없는 걸 상상했다는 듯 질색하는 표정으로 팔을 쓸어내렸다.
“맛있게 먹었냐?”
아이가 대답을 머뭇거렸다. 솔직하게 답하면 될 걸, 다치게 한 사람에게 밥을 얻어먹는 것에 혼란이 온 듯했다. 하지만 그만큼 사정이 급했던 것이다. 분명 죽거나 어디 한 쪽 잃을 게 뻔한데 귀족 죽이자고 덤볐으니.
“이건 귀족으로서의 염치야. 갚을 필요 없어.”
아이가 당황해하며 케일과 최한을 번갈아 봤다. 그리곤 눈동자가 희미하게 일렁였다. 하필 덤벼든 귀족이 정말 드물게 보이는 선량한 귀족이었다. 그에 감동한 아이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아이가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않자 최한이 일으켰다.
“그렇게 함부로 덤비다가 명줄 끊긴다.”
나이 어린아이에겐 잔혹한 말일지도 몰랐지만 가혹한 집안 사정으로 또래보다 성숙한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로 자신이 한 짓이 얼마나 바보 같고 미숙했는지 깨달았을 터였다.
잠시 아이를 응시하던 케일은 가게의 창문 밖에 시선을 두었다. 밖은 벌써 밤새 열 것 같았던 장터가 문을 닫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내부를 정리하는 가게를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높게 뜨고 주위를 밝히는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유난히 별이 잘 보인다고 유명한 이유가 있었다. 두 아이의 시선도 어느샌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서로의 손을 잡은 채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는 네 개의 눈동자가 반짝이며 빛났다.
“언니.”
아이가 제 가족을 부르며 높은 하늘을 가리켰다.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몰라도 최한과 하늘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웃었다. 그리곤 최한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저씨. 저기 저 별 보여요?”
남쪽하늘에서 유난히 밝게 빛나는 푸른 별을 가리켰다. 최한은 그걸 알아채곤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동생이 저게 아저씨 같대요.”
칭찬이겠지? 그는 고맙다며 웃어주었다. 케일도 아이의 손을 따라 시선을 하늘로 옮겼다. 저거 분명 어디 서적에서 본 것 같은데. 청백색의 별을 따라 머릿속으로 가선을 이었다.
……개? 지금 최한한테 개 같다고…… 케일은 거기서 생각을 그만두었다.
최한은 밝은 별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했고, 케일은 아이가 의도한 의미를 잘 알아챘다. 매번 기사를 보며 눈을 빛냈던 아이가 가진 단순한 지식이었다. 청백색의 별이 유독 눈부신 개의 모습이 아이에게는 크게 와닿았다. 언젠가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사가 되기를 바라면서 머릿속에 넣었던 이야기였다. 아이가 최한을 보며 별을 보듯 눈을 빛냈다.
최한은 아침이 밝을 때까지 두 아이의 곁에 있겠다는 것을 케일은 말리지 않았다. 고작 며칠 묵을 것이지만 나름 심사숙고해서 고른 침대에서 케일은 자지 못했다. 결국 뜬 눈으로 해가 뜨는 것도, 최한이 돌아오는 것도 모두 지켜보았다.
최한의 손바닥에는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상처가 아직 남아있었다. 그가 오자마자 손을 낚아챈 케일은 손수건으로 가려둔 손을 보고 혀를 찼다.
“맨손으로 칼을 잡긴 왜 잡아?”
퉁명스러운 케일의 말투에 가만히 붕대 감는 것을 보던 최한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걱정하는 듯한 기색은 여전했다.
“아이들은 무사히 돌아갔습니다.”
“그래?”
“원래 있던 시설로 돌아간다더군요.”
케일은 대꾸 없이 묵묵히 최한의 손을 붕대로 칭칭 감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걸 알면서도 애써 상처를 감쌌다.
“지금은 치료해줄 신관도 없는데, 다치기나 하고.”
“아니었으면 케일님이 다쳤으니까요.”
최한이 제 앞의 이를 보며 웃었다. 케일은 그 얼굴을 보더니,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그래.”
케일은 어젯밤의 별이 떠올랐다. 아이가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만도 같았다. 지금 보니까 조금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케일이 자그마한 미소를 띠우자 최한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웃냐는 질문에도 그는 터진 웃음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