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방 지원부 소속, 두뇌파 서포트 출신 김록수. 회사에서는 그를 이수혁의 개라고 불렀다. 이수혁이 데려온 독종, 충견 김록수. 김록수도 자신의 별명을 알았으나 딱히 정정하지는 않았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기에.
오히려 길길이 화를 낸 사람은 이수혁이었다.
"팀장은 왜요?"
"왜? 지금 그 얘기가 나오냐 이 자식아."
"......"
"뭘 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하지만 김록수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었다. 김록수는 실제로 이수혁 말만 듣는 충견이었으니까. 당장 팀원들도 개라는 표현은 기분이 나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분위기였다.
아, 당사자라 그런가. 김록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김록수의 어이없는 생각을 이수혁은 표정만 보고도 알아차렸으나 저 답답한 놈에게 설명해봤자 안 들을 게 뻔하다는 것을 알아 그냥 포기했다.
김록수는 항상 그랬다. 자존감이 낮은데 자신감이 넘쳤다. 자기에 대한 애정은 바닥을 기는데 기겁할 생각에 대한 행동력은 정상에서 놀았다. 시작을 하면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끝을 봐야 하는 사람이었다.
이수혁은 그런 그를 그저 미련한 놈이라 여겼다. 보고 있으면 대단한데 불쌍하고 안쓰러운데 재밌었다.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 느꼈을 때가 이때일지도 모르겠다.
*
괴물이 나타났다. 그리고 김록수가 다쳤다.
이수혁을 구하기 위해 후방에 있어야 할 그가 최전방에 뛰어들었다. 이수혁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선명했다. 섬뜩했던 그때의 감정도 선명했다. 바로 앞에서 저를 밀치고 대신 맞아 벽에 부딪힌 김록수가, 겨우 정신을 붙잡으며 입으로는 정보를 읊는 김록수가, 끝까지 멀쩡한 척 하다 상황이 정리되니 쓰러지던 김록수가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이수혁은 병원 침대에 평화롭게 누워있는 김록수를 바라봤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멀쩡한 사람의 몰골은 아니었다.
"평화로운 건 표정뿐이지."
하얗게 질린 얼굴과 자잘한 상처로 밴드나 붕대가 칭칭 감겨있는 모습은 빈말로도 평화롭다할 수 없었다. 이수혁은 침대 바로 옆에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어이없게도 다쳐야 쉬는 김록수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안쓰러웠다. 그렇게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을까 김록수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 팀장?"
김록수는 흐릿한 시야에 눈을 찌푸렸다. 서서히 들어오는 시야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이수혁이었다. 능글맞은 평소와는 다른 굳은 표정의 이수혁이. 잘못한 게 있는 김록수는 입을 닫고 곁눈질로 힐끔힐끔 쳐다봤다. 빨리 다른 팀원들이 오기를 바라면서.
"하..."
침묵 속 이수혁이 한숨을 내뱉었다. 이수혁의 한숨에 김록수의 몸이 움찔거렸다. 슬금슬금 눈을 피하는 게 꼭 장난치다 걸린 강아지 같았다. 불쌍하게 눈치를 보니 화도 못 내겠다.
"김록수, 다음 번에는 제발 후방에 있어라."
똑같은 상황이 온다면 김록수는 또다시 튀어 나갈 것이었다. 그건 김록수도 알고 이수혁도 알았다. 그렇기에 김록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고 이수혁은 믿을 수 없는 구두 약속을 믿는 수 밖에 없었다.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이수혁은 김록수의 오른팔을 보고 픽 웃었다.
"넌 다친김에 좀 쉬어."
"멀쩡한데요."
"그래? 네 오른팔을 봐라. 멀쩡한지."
김록수의 시선이 이수혁에게서 자신의 오른팔로 옮겨갔다. 초록색의 깁스가 인상 깊었다. 아, 젠장.
"당분간은 신입이 없겠네."
승자처럼 웃는 이수혁을 살짝 째려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
이수혁은 요즘 살만했다. 유능한 신입이 없어 몸은 힘들었지만 천방지축인 신입이 없어 정신은 쾌적했기 때문이었다. 시계를 바라보던 이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님, 또 록수한테 가요?"
"그 정도면 사랑인데요!"
"어쭈. 요즘 편했나보다?"
"아뇨! 록수한테 빨리 나으라고 전해주세요! 록수가 없으니까 진행이 안돼..."
이수혁은 록수의 중요성을 깨달은 팀원들을 뒤로 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김록수는 굳이 병원 있을 필요가 없다며 퇴원 시켜달라고 노래를 불렀지만 이수혁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혼자 있으면 또 일을 찾아서 할 놈이라 옆에서 챙겨줘야 했다. 일은 찾아서, 만들어서 하고 다니면서 무슨 백수를 하겠다고.
정 심심하면 읽으라고 갖다 놓은 판타지 책을 읽고 있던 김록수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매일 같이 병실에 출근 도장을 찍는 이수혁을 바라보며 김록수는 익숙하게 말했다.
"퇴원이요."
"애들이 빨리 나으래."
"다 나았습니다. 퇴원 시켜주세요."
"깁스에 글씨 예쁘네."
초록색 깁스에는 여러 글씨체들이 쾌유를 빌고 있었다. 팀원들 작품이었다. 김록수가 자는 틈에 병문안 온 팀원들은 키득키득 웃으며 걸작을 만들고 갔다. 이를 갈고 있는 김록수를 아는 건지 그다음부터 이수혁을 통해서만 말을 전했다.
"아, 진짜."
김록수는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김록수의 말을 들어주던 이수혁은 문뜩 생각했다. 귀엽네.
"팀장?"
"어, 어?"
"피곤합니까?"
"그런가."
진짜 그런가보다. 김록수보고 귀엽다니. 아이들을 볼 때의 귀여움이 아니란 것은 이수혁이 가장 잘 알았다. 이수혁이 딴 생각을 할 때에도 김록수는 계속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제야 이수혁은 이 감정이 꽤 익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시렁거리는 김록수를 보며 이수혁은 방금 전 팀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정도면 사랑인데요!'
'그러게. 진짜 사랑이네.'
내가 얘를 좋아하는구나. 이수혁은 깨달았다. 새파랗게 어린 애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양심을 쿡쿡 찔렀지만 일단은 둘 다 성인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양심을 보호해줬다.
어느 감정이 다 그렇듯 한번 자각하면 버릴 수 없기 마련이다. 하물며 사랑은 더하면 더했지. 이수혁은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왜 이제야 알아차렸나 싶을 정도로 김록수가 귀여웠고, 예뻤고, 좋았다.
이수혁은 유능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항상 좋은 결과를 내왔었다. 그래서 이수혁은 자신이 있었다. 저 눈치 없는 놈을 짝사랑하는 것에, 나아가 꼬실 자신이 있었다.
*
신입이 퇴원하고부터 팀장이 이상해졌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눈으로 김록수를 쫓아다니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 친근하지만 사무적이던 사무실에 핑크빛이 가득했다.
"팀장 눈에 누가 꿀 넣어놨냐?"
눈을 살짝 찌를 듯 내려온 김록수의 앞머리를 이수혁이 다정하게 넘겨주는 모습을 보며 한 팀원이 말했다. 머리카락 넘겨주는 게 저렇게 달콤할 일인가? 근데 그게 또 작위적이지 않아서 더 괴로웠다.
"저 핑크빛 어떡할 거야."
"핏빛이 아닌 게 어디야."
듣고 있던 팀원들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사이가 안좋은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솔직히 재밌기도 했다. 눈에 뻔히 보이는 작업멘트에도 김록수는 눈치 없음으로 대항했기 때문에 그 완벽한 팀장이 쩔쩔매는 게 재밌었다.
"왜 계속 봅니까?"
"예뻐서."
"아, 예."
팀원들은 점점 대담해지는 이수혁을 보고 웃다가 떨떠름한 표정의 김록수를 보고 안타까운 침음을 흘렸다. 심지어 김록수는 부하직원에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타박까지 했다. 아니 누가 부하직원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저런 말을 해...
이수혁의 표정이 굳어졌으나 서류를 보고 있던 김록수는 그를 보지 못했다. 힐끔힐끔 보고 있던 팀원들은 눈치를 보다 어색한 연기로 나가봐야 하는 이유를 읊으며 나갔다. 갑자기 조용해진 주위에 서류를 내려놓은 김록수는 텅 빈 사무실을 훑어보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이수혁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왜요?"
"너 말대로 누가 부하직원에게 이런 말을 해."
데려다달라고 부탁도 안 했는데 먼저 물어보고, 먹고 싶다고 했던 거 생각해서 사 오고, 면전에서 예쁘다는 말을 누가 부하직원에게 하겠어.
"나 너 좋아해, 록수야."
*
"나 너 좋아해, 록수야."
이수혁의 고백에 김록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싫어서가 아니었다. 기록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 어지러워서였다. 이수혁의 다정한 기록들이 스쳐 지나갔다.
'데려다줄까?'
'전에 먹고 싶어 했잖아.'
'예뻐서.'
김록수는 눈치가 없었다. 모두가 아는 아주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김록수의 숨겨진 능력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운명이 연결된 순간부터 김록수는 이수혁을 주시해왔다는 것도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하들 개가 주인의 감정 변화도 모를까. 김록수는 알면서도 모른척했던 거였다. 무서워서. 이수혁의 감정이 이 세계의 설정값일까 봐.
*
김록수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곤 했다. 귀신같은 그런 영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럼 무엇을 보니 하고 물으면 어린 김록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김록수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뭔지 모를 무언가로 어딘지 모를 어딘가에 묶여 있었다. 어린 김록수는 사람들에게 묶인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이상한 것들이 얽히고설킨 세상에서 새로운 깨달음은 세상이 바뀌고 나서 얻었다.
아, 이게 능력이구나.
괴물이 튀어나오고 사람들은 재앙에 대항하지 못했다. 혼란한 상황에서 사람이 죽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자 이리저리 엉킨 것들이 팅 하고 끊어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 당시를 잊지 못한다. 능력을 제어하지 못하니 눈앞에서 빽빽하던 것들이 하나씩 끊어지는 것이 전부 보이던 장면을.
어느 것 하나가 끊어졌다. 끊어진 것은 하난데 두 명의 사람이 풀려났다. 그때 알아챘다. 이 색색의 것들이 인연이구나. 운명이였구나.
분명 인연이 없는 사람일터인데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일터인데도 우수수 끊어져 흩어지는 것들을 보자니 미칠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갇힌 것일지도 모른다. 눈물인지 운명의 연결고리인지가 후두득 떨어진다.
3일. 밖에서 인기척 들렸다. 김록수의 심장이 오랜만에 격하게 뛰었다.
"... 거기 밑에, 내 목소리 들리나?"
하지만 이수혁의 목소리를 듣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기묘한 감각이었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이수혁의 얼굴이 보였다. 이수혁이 씩 웃으며 말했다.
"새끼, 멀쩡하네."
김록수는 웃는 이수혁을 보며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이수혁을 보는 순간 없었던 운명이 저와 이수혁을 묶어버렸으니까.
*
"이 감정이 단순히 운명 때문에 생긴 거면 어떡해?"
김록수가 무서워했던 것이었다. 이 감정이 빌어먹을 세계에서의 설정값이라면? 이 운명의 끈이 없었어도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을까? 김록수는 운명이 꼭 목줄 같다고 생각했다. 운명이 묶은 건 둘인데 정작 줄은 신한테 있는.
김록수의 표정이 말을 하면 할수록 어두워져 갔다. 그런 김록수의 등을 팍 치며 얘기했다.
"록수야, 네 감정도 이 세계의 설정값 같아?"
"......"
"모든 사람들이 운명의 상대를 만나나?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아주 잘 안다. 아직 김록수는 저와 이수혁 빼고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설정값이면 어때. 그렇게 세세하게 생각하면 여기에 태어난 것도 설정값이 되는데."
*
오늘도 일이 많았다. 적은 날이 없기는 했다. 이수혁은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넘겼다. 불어 넘기며 앞을 보니 김록수가 보였다. 아, 귀여워. 거의 차였는데 정리가 안됐다. 정리할 마음이 없기도 했다.
김록수를 보고 있으니 눈이 마주쳤다. 눈을 깜빡이던 김록수는 휑한 사무실을 둘러보고는 뜬금없이 말했다. 무심한 표정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어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내용이었다.
"개보다는 애인하려고요."
"어?"
"아쉬우면 팀장이 개 하던가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의아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수혁의 당황한 표정은 오랜만이었다. 당황한 것도 같고 황당한 것 같기도 했다. 김록수는 상황도 잊고 웃을 뻔했다.
"하, 그래."
하지만 이내 이수혁은 김록수를 보며 웃었다. 그때처럼. 김록수도 묶인 운명이 아닌 이수혁을 보면서 그를 따라 웃었다.
*
"내가 록수의 개하면 되는 거야?"
"그냥 한 말이었습니다."
정말로 그냥 한 말이었다. 김록수는 이수혁의 애인이자 여전히 개였으니까. 김록수는 많고 많은 운명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찾았고 개는 주인을 잊어버릴 수 없다.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