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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썩을 것들이.”

 

인어들의 간이 배 밖에 튀어나오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뭐가 그리도 절박한지 인어들은 연금술로도 모자라 금기된 흑마법을 이용해 마나를 몸에 품고 고래족들을 공격했다. 그 덕분에 바다 곳곳에는 수많은 인어들과의 전투가 벌어졌고, 전투 대장인 아치는 거의 모든 전투를 휩쓸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러나 아무리 바다와 같은 체력과 힘을 가진 고래라지만, 쉴 틈 없이 계속되는 기습과 전투는 당연히 전사들의 체력을 갉아먹었고, 이는 아치도 마찬가지였다.

인어들이 끈질긴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끈질길 줄은 몰랐다. 아치는 온갖 상처를 입은 채 후퇴 중인 인어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변의 풍경들을 쳐다봤다. 이전의 심해에서는 여러 생물들이 조화롭게 자라고, 생활하고 있었으나 계속된 전투들로 인해 바다는 황폐해진지 오래였다. 죽은 마나의 잔해로 인해 검게 녹아내리며 그을린 산호들, 어린 고래와 약한 바다 생물들의 사체들. 절로 이가 갈렸다. 내리 한 달 동안 죽어나간 어린 고래들과 바다의 아이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제 피를 이용해 죽은 마나의 잔해들을 지우고, 사체들을 정리하며 황폐해진 심해를 수습하던 아치는 작지만 본능에서 나오는 불길함을 느꼈다. 항상 제가 이곳에 들릴 때 마다 보이던 고래 몇 마리들이 보이지 않았다. 애써 대피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어쩐지 적신호가 머릿속을 물들이고 있었다.

 

 

 

 

 

“전투대장님! 인어들이 또 죽은 마나를 품었습니다!”

 

아치의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전이었다. 아직 확실하지 못한, 제 감에 의한 것이었기에 위티라에게도 보고를 올리지 못했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인어들이 쳐들어온 것에 아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이 천막에서 나오니 자박거리며 모래가 밟혔다. 인어와 고래의 경계선인 히아스섬의 저 멀리서 검은 물이 퍼지고 있었다. 죽은 마나가 또 다시 바다를 물들이며 고래들을 유인하고 있었다.

아치가 바닷물에 잠기자 곧 거대한 범고래가 모습을 드러냈다. 범고래는 빠르게 검게 물든 지역으로 향했고, 그 뒤로 대여섯의 고래가 함께하고 있었다. 검은 지역에 다다랐을 때 아치는 이전에 느꼈던 불길함을 볼 수 있었다. 얼핏 보면 죽은 마나를 지닌 인어였지만, 그와는 다른 기괴함이 느껴졌다. 평생 겪은 전투 경험과 본능이 마치 사이렌같이 울렸다. 이제껏 겪어왔던 것들과는 다른 변종이었다.

 

“모두 즉각 후퇴한다.”

“네? 하지만…, 평소보다 인원이 적습니다. 기회가 아닙니까?”

“닥쳐. 얼른 히아스섬으로 돌아가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도록. 그리고 너, 당장 위티라님에게 변종이 나타났다 일러라.”

 

무조건적인 패배였다. 만약은 없을 것이다. 아치는 당장 제 뒤를 따라온 고래들을 히아스섬으로 돌려보내고, 제 부관을 지목해 위티라에게 전령을 보냈다. 서둘러 제게서 멀어지는 고래들을 보던 아치는 제 쪽을 쳐다보는 변종을 마주했다. 역시 무언가 다른 위험함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아치는 제게 달려드는 인어들을 하나하나 물어뜯으며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내뿜었다. 자신의 동료가 죽어감에도 변종은 아무런 낌새를 보이지 않고, 빠른 속도로 저와 가까워지는 범고래를 눈으로 쫓았다. 죽은 마나를 그대로 받아내던 아치는 고래의 몸이 한계치에 다다를 때에서야 인간으로 변해 자신의 피를 주변에 흩뿌렸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대로라면 바다를 뒤덮은 죽은 마나가 사라져야 했으나, 군데군데에 검은 것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의아함을 가지는 것도 잠시 아치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온 변종에 의해 몸을 뒤로 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인어와는 다른 움직임. 아치는 경계하며 변종과 주먹을 주고받았다.

 

“뭔 거지같은 것들이 변종까지 만들어내고. 인어들은 그렇게 할 짓이 없나?”

“…시, 끄, 럽다.”

 

아치의 빈정거림에 변종의 뚝 뚝 끊어지는 답변이 돌아왔다. 별 재미없는 놈이라 칭하며 아치가 주먹을 내질렀을 때 아치는 제 몸의 이상이 생긴 것을 알아챘다. 중심이 맞지 않았다. 마치 독한 술을 먹은 것 마냥 시야가 두 개, 세 개로 나뉘어졌다. 아치는 절로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고, 변종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아치의 배에 묵직한 주먹이 꽂혔다. 운이 없게도 검은 마나를 쇄하기 위해 상처를 둔 곳에 주먹이 든 탓에 아치의 몸은 휘청거렸다.

 

“이런, 별 쓰레기 같은 게…!”

 

아치의 욕설이 잇새 사이로 내뱉어졌지만 곧 다물 수밖에 없었다. 변종의 팔이 터져나갔다. 그와 짙디짙은 죽은 마나가 파동을 따라 퍼졌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겠다는 듯이 모든 것을 검게 물들였다. 일렁이는 죽은 마나들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보려 아치는 빠르게 제 피를 뿌려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변종과 벌였던 전투에 많은 힘을 쓴 아치였기에, 죽은 마나를 상쇄시키려 뿌렸던 피는 별 효력을 보이지 못했다. 젠장할. 상당수의 죽은 마나들을 없애는 것에는 어찌 성공했지만 아치의 시야는 점차 어두워졌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이었다. 이전과는 다른 죽은 마나의 존재를 위티라에게 알려야하건만 아치는 현재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힐끗 아치의 시선은 겨우서야 변종에게로 닿을 수 있었고, 그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이없네.

 

“뭐.., 야. 변종은, 변, 종이라는, 건가?”

 

변종이 스스로 터뜨렸던 팔이 재생되어 있었다. 폭발에 의해 너덜거리는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검은 혈관들이 어두운 시야 속에서도 생생히 보였다. 아치가 죽은 마나를 다 없애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변종은 천천히 다가왔다. 아치는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변종은 그보다 더 빨랐다. 순식간이었다. 아치의 시야가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무언가 반응할 틈도 없었다. 묵직한 주먹들이 온 몸에 들이닥쳤다.

 

‘시켈러님 말고 이렇게 맞은 건 또 처음이군. 빌어먹을.’

 

그 우스운 생각을 끝으로 아치는 의식을 잃었다.

 

 

* * *

 

 

아치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인어족의 본거지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손과 발에는 쇠사슬로 묶여있어서 거동이 불편했다. 모래바닥에 질질 끌려가는 꼴에 스스로 웃음이 나왔다. 무성한 수풀 너머로 독이 가득한 호수가 보였다. 아직 호수에 들어서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독성이 강한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래의 강한 피부가 붉게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어나라.”

 

아치의 정신이 깬 것을 알아차렸는지, 그를 끌고 가던 변종은 아치의 머리칼을 잡아끌어 일으켜 세웠다. 하, 더럽게도 아프네. 아치는 겨우 몸을 일으켰지만 저의 의식이 없을 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아치의 몸이 휘청였지만 변종은 봐주지 않겠다는 듯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몇 번을 쓰러지고 나서야 도착한 인어의 본거지는 호수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본거지 안에서는 인어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욕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시궁창 같은 새끼들.

 

아주 가관이었다. 저 한편에서는 인어족들에게 인질로 잡혀 온 고래족의 전사들과 아이들이 진녹색의 독을 옮기고 있었고, 다른 편에서는 인어들에게 생체 실험을 당하고 있었다. 그래, 제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고래의 실종이 인어들과 연관된 것이 맞았다는 것을. 인질로 삼을 것은 알고 있었건만 실험체로 까지 쓰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당장이라도 제 목에 걸려있는 피리를 불어 고래족의 전사들을 불러들이고 싶었지만, 아치는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때까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기에.

그렇게 아치는 어느 깊숙한 호수 동굴에 변종이 밀치는 대로 갇혀져, 그를 쳐다보며 이를 악무는 것 밖에는 없었다.

 

인어들은 아치에게 매일 일정한 시간에 무언가를 주입했다. 대체 무얼까 생각해봤지만, 주입된 약물은 그의 생각을 흩뜨리곤 했다. 겨우 선잠에 들 때마다 그가 두려워하는 악몽이 아치를 괴롭혔고, 낮에는 생각을 못하게 해 정신을 조금씩 망가트렸다. 겨우 제정신이 돌아올 때는 약물을 주입하기 직전의 시간뿐이었다.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알려야하는데. 아치는 제게 다시 약물을 주사하고자 들어올 때를 이용하기로 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아치는 제게 다가오는 인어의 수를 세고는 사슬을 휘둘러 인어족 한 명을 잡아 목을 조여갔다.

 

하나,

둘,

셋.

 

쇠사슬에 목이 졸린 인어족은 얼마 되지 않아 축 늘어졌고, 아치는 남은 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연구가 본업이라 날카로운 살기를 직접적으로 마주한 것이 처음인지 아치와 눈을 마주한 인어족은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삐이이이- 삐- 삐이- 삐이익

 

가느다란 피리 소리가 넓게 울려 퍼졌다.

 

 

* * *

 

 

“뭐라고 했지?”

“아치 전투대장님이 위험합니다. 변종이 나타났다 이르라 하셨습니다.”

 

아치의 전령을 전하는 부관의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위티라의 분노가 마치 눈으로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위티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을 때 부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만 물러가도 좋다.”

“바다의 권능이 함께하기를.”

“이만 회의를 마치는 것이 좋겠군. 다들 물러가도록.”

““바다의 권능이 함께하기를.””

 

고래족의 가신들과 고위전사들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궁전 안에서 물러났다. 텅 빈 궁전에는 위티라만이 홀로 옥좌에 앉아 손가락으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현재의 그녀는 짜증이 솟구칠 대로 솟구친 상태였다. 끈질긴 인어놈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투를 벌이지 않나, 그 전투에 휩쓸려 죽어나간 바다의 생명들도 적지 않았다. 좋지만은 않은 상황에 아치의 전령이 본인의 위험한 상황을 말하고 있는 지금, 생각 같아서는 모조리 박살내고 싶었다. 그러나 차기 고래왕인 그녀의 어깨엔 짊어진 것이 너무나도 많아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파세톤, 아치가 지금 어디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겠지?”

“조금의 어려움은 있겠으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위티라는 그 길로 아치의 행방을 파세톤에게 맡겼으나 좋은 소식은 들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변종과 전투를 벌였던 흔적은 발견했으나, 그것이 끝이었다. 흔적이 끊겨있었다. 인위적으로 끊긴 흔적에 위티라는 입술을 짓이겼다. 아치를 찾는 와중에도 자잘한 전투들은 계속되었고, 많은 고래족들이 점점 지쳐갈 때쯤에 고래족만이 들을 수 있는 아치의 피리소리가 위티라의 귓가에 닿았다.

 

부상.

인질.

사라진 고래.

빠른 구출.

주의,

 

아치다운 간결한 신호였다. 전체적인 상황만을 얘기하고는, 본인에 대한 상태는 일언반구도 없는 것이 불만족스러웠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신호라도 보낸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했다. 위티라는 아무런 언질도 없는 아치의 상태에 애써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며 최정예 전사들을 꾸려 출정을 준비했다.

 

 

* * *

 

 

역시 고래의 귀를 가진 자가 있었다. 역겨운 새끼들. ‘암’이라는 녀석들과 손잡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바다의 군주가 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알 필요도 없었지만. 아치는 동굴 입구에 서 있는 자들을 날카로이 쳐다보며 제 발 아래 널브러져있는 이들을 발로 걷어찼다. 물론 비웃는 것은 덤이었다.

 

“니들이 아무리 발악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아니, 있겠네. 멸족에 이르겠군.”

 

바다의 군주는 건재하기 이를 데 없으니까.

아치의 말에 같잖게 분노하기라도 한 듯 그들은 변종을 데려왔고, 그는 곧 아치의 앞에 섰다.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전투가 있었던 날보다 거대해져 있었고, 풍겨 나오는 기운도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순식간이었다.

 

주먹이 날아들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험에 아치는 가드를 올렸지만 그 뿐이었다. 역시 변한 것이 맞는지 이전보다 훨씬 묵직해진 주먹에 아치는 두 세 걸음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캄캄한 동굴 그늘에 가려진 아치의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후로는 죽지는 않지만 그만큼의 고통이 뒤를 이었다.

 

삐이, 귓가에 이명이 날카롭게 날뛰었다. 머리를 잘못 맞기라도 했는지,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입안도 같이 찢어졌는지 비릿한 한 것이 느껴졌다. 아치는 휘청이는 몸을 다잡으며 욕설을 내리깠다. 빌어먹을 새끼들, 지들 독에 썩어 문드러지라지. 물론 육성으로 내뱉은 탓에 복부에 주먹이 내리꽂혔다. 상처들은 진작에 벌어져 피가 낭자했고, 더불어 아까부터 맞은 탓에 고래의 두꺼운 피부에는 거멓게 멍이 물들여졌다. 그제서야 만족한 것인지 인어족들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치를 비웃곤 변종을 데리고는 동굴 안을 빠져나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아치는 겨우 제 몸을 가누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아마 저의 왕, 위티라는 제 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출발했을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내일 당장 들이닥칠지도 몰랐다. 다만 불안한 것이 있다면 저의 위치와 인어들의 대비였다. 물론 그녀의 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번의 변종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그로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아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밝아져가는 하늘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 * *

 

 

위티라는 채찍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박살냈다. 날파리같은 인어들의 몸들이 짓이겨지고, 으스러졌다. 아치에게서 들려왔던 피리소리 중에 중간에 끊긴 듯한 것이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최정예의 전사들은 불필요의 시간 낭비 없이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고,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어느 뭍에서 이동을 멈췄다.

 

“잠깐.”

 

대놓고 인어들이 어느 섬을 지키고 있었다. 철저하게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이 맞는 것 같았다. 모래사장으로 걸음을 옮기자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인어들이 일행의 주위를 둘러쌌다. 변종을 비롯하여 모두들 저마다의 위협적인 무기를 들고 있었지만 분노한 혹등고래의 앞에선 모두가 무력했다. 혈이 섞인 채찍은 변종을 순식간에 처리했다. 모래사장 위로 변종의 몸에 갇혀있던 죽은 마나들이 스며들었다. 위티라는 친절히도 하나하나 다 상대해가며, 인어들을 무너뜨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숲 안쪽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숲의 안쪽은 검푸른 독이 즐비했지만, 고래의 후계자에게는 닿지 못했다. 별 거추장스러운 동굴로 이루어진 통로를 지나니 분주히 움직이는 인어들이 보였다. 각자의 무기를 집은 인어들 사이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고래족의 전사와 아이들이 있었다.

 

“당장 저들을 제압, 아니. 전부 사살하고 고래들을 구하도록.”

 

위티라의 명령은 간단명료했다. 고래족의 최정예 전사들은 스스럼없이 후계자의 명령을 받들었고, 잠시 후, 숲에는 비릿한 혈향이 진하게 퍼졌다. 잡힌 포로들은 전사들에게 맡긴 위티라는 곧바로 아치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감각은 아치의 방향을 알려주었고, 위티라는 제 감을 믿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치!”

 

어느 어둡고 침침한 동굴 안에 위티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덕에 깊숙한 곳에 갇혀있던 아치에게도 위티라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치를 인질로 삼으러 온 인어의 왕족의 귀에도 전해졌다. 어지간히 무섭기라도 했는지 서둘러 아치의 머리칼을 잡아 억지로 일으키며 그를 앞에 내세우고 위티라를 기다렸다.

 

“고래의 후계자여, 어서 오시길. 그대를 기다렸습니다.”

“당장 그 더러운 손 떼는 게 좋을 텐데.”

“당신이 이 자를 무척이나 아낀다고 들었습니다.”

 

뿌득, 위티라는 이를 갈았다. 잠깐 훑어본 아치의 몸 곳곳에는 온갖 상처들이 자리하고, 독의 흔적을 비롯해 뜯겨진 팔소매 사이로 주삿바늘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위티라의 분노를 느끼기라도 한 듯 왕족은 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칼을 빼내니 칼날에는 인어의 독과 죽은 마나가 발라져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예술행위 마냥 천천히 그 칼날을 아치에게 향했다.

그래, 유희였다. 제 가족을 죽인 자에 대한 복수는 달았다. 소중한 이가 죽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 재밌을 터였다. 아치의 목에 칼날이 닿아 붉은 줄이 그어졌고, 인어의 왕족은 곧 위티라에게 절망을 안겨줄 수 있다는 생각에 심취해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했다.

 

“무슨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아치는 칼날을 피하며 몸을 뒤로 뺐다. 뒤로 밀려진 중심은 인어왕족을 당황스럽게 만들기 적당했고, 아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몸을 숙여 칼을 피해 땅을 굴렀다. 온전히 칼을 피하지 못해 얼굴에는 생채기가 생기고, 울퉁한 돌바닥에 부딪힌 몸이 고통을 호소했지만 아치는 애써 무시한 채 벌떡 일어서서는 왕족의 팔을 쳐냈다. 돌발적인 상황에 당황한 것인지 그는 칼을 놓쳤고, 그 칼은 아치의 손에 들어왔다. 칼을 피하며 얼굴에 상처가 난 것과 동시에 머리칼도 잘렸는지, 파도를 닮은 흰 머리칼이 우수수 바닥에 흩어졌다. 눈가와 가까이 자리한 상처덕분에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아, 죽겠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위티라였다. 왕족이 자세가 흐트러진 아치의 손에서 칼을 빼내려 했지만, 위티라의 채찍은 왕족의 몸을 속박하고, 조금씩 옥죄여갔다. 우드득, 뼈들이 부서지는 서리가 나서야 위티라는 채찍을 거두었고, 아치는 칼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는 털썩 쓰러졌다. 더럽게 아프네. 모든 게 끝나고 나니 절로 눈물이 나왔다. 온갖 고통들이 그를 괴롭히는 탓에 아치는 속으로 오만가지의 욕을 하며 서서히 무거운 눈꺼풀을 닫았다.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푸른빛의 머리칼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 * *

 

 

눈을 뜨자 시원한 얼음으로 이루어진 천장이 보였다. 아치는 두 눈을 꿈벅이며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고, 그곳에는 위티라가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전투대장이 깨어났다. 와서 살펴보도록.”

 

군의관은 아치의 몸을 이리저리 뒤적이고는 별 다른 이상이 없음을 야기했다. 아치는 두 주먹을 쥐었다 피며 저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얼굴에 났었던 상처는 흉터 없이 치료되어 있었고, 오락가락했던 정신도 지금은 말끔했다. 피해는 뭉텅이로 잘린 머리칼 밖에 없었다.

 

“대장님! 저 진짜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요!”

“시끄러워! 대장님 지금 누워계시는 거 안 보여?”

“위티라님께서 인어의 왕족들은 모조리 다 잡아들이셨어요. 사돈의 팔촌까지 잡으신 거 보면 정말로 멸족이신걸까요?”

“그런데 머리카락이 많이 부족해지셨네요..”

“다 저리가. 꺼져. 시끄러!”

 

아치의 부하들이 언제 들어온 것인지 시끌벅적 했다. 위티라의 무서움을 논하는 자부터, 현재의 상황을 다 알려주는 부관과 제 머리칼의 안부를 묻는 놈까지. 아치는 정신이 없다며 모조리 내쫓고 나서야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항상 시야에 보이던 흰색의 머리칼이 부분부분 비어있었다. 그간 기른 이유가 위티라가 좋아하는 기색이였지만, 지금과 같은 더러운 모습은 싫어하지 않을까 싶었기에 아치는 망설임 없이 자리서 일어섰다.

 

“아치?”

 

이제야 겨우 일어난 놈이 어딜 간 건지. 인어족들을 거의 멸족시키고 돌아온 위티라는 비어있는 침실에 인상을 찌푸렸다. 언젠간 묶어놔서라도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게 해야할 터였다. 부상을 우습게보니 이번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한숨을 내리쉬던 위티라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져 그녀는 시선을 향했다.

 

“어? 오셨어요?”

 

아치의 머리칼이 한층 짧아져 있었다. 말 그대로 부서지는 파도를 닮아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흰 머리칼이 잘게 흔들렸다. 위티라가 그의 머리카락을 빤히 쳐다보자 멋쩍은 듯 변명을 늘어놓던 아치였다.

 

“아니, 뭐.. 얼굴 안 그이고 머리카락만 자른게 다행이잖아요. 이참에 기분전환도 할 겸 자르고, 잘린 것들은 앞날을 위해 신에게 바치기로 했죠. 위대한 혹등고래가 바다를 삼킬 때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머리카락을 제물로 삼아 한 번만 도움 달라고 하죠.”

 

머리카락은 어차피 다시 자라잖아요? 네?

어쩐지 심각해진 위티라의 표정에 아치는 절절매며 위티라의 손을 잡고 그래도 잘 살아있노라 말을 놀리다가 결국에는 강제적인 침대행으로 하루가 마무리 되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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