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새 학기가 시작된 4월의 하교 시간. 금방 교실의 불이 꺼지는 것에 반해, 학생회실에는 막 불이 켜졌다. 이는 늘 그랬다. 작년의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그리고 다시 돌아 지금도. 이처럼 한결같이 학생회실의 불을 켜는 건 올해 학생회장이 된 알베르였다. 익숙하게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은 알베르는 상의해야 하는 일을 분리하고 가만히 파일을 살폈다. 굳이 이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는 꾸준히 이 일을 반복했다. 누가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니냐 물으면,
‘일을 대충 끝내고 나면 혼자 공부할 수 있었으니 나름의 이익이 있다.’
늘 이런 식으로 둘러대며 늦게 남았었다. 물론 이것 때문에 남는 건 아니었다. 일 열심히 하면 좋아할 사람도 많고 평판도 좋아지는 등 다 노리고 하는 일이니 어찌 멈추겠는가? 그래서 알베르는 웃는 낯으로 무난하게 권유를 넘기며 남아있곤 했다.
딱 작년까지만 해도. 여느 때처럼 파일에 정리된 프린트를 읽어내리던 알베르는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대략 한 시간이 더 지난 시각. 알베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학생회실 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리며 시큰둥한 얼굴이 보였다.
그래, 올해부터는 이 시간마다 저 표정으로 매일 학생회실을 찾아오는 이 끈질긴 후배님 때문에, 늦게까지 남아있기가 어려워졌다. 지난 겨울 방학에 만나 꾸준히 얼굴을 맞대서 정이 쌓여버린 후배님. 케일 헤니투스. 알베르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냥 돌려보냈더니 문 앞에서 알베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걸 알아버려서, 그냥 들어와 기다리라고 하니 아예 매일 찾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안 생겨서는, 하루도 거르질 않았다. 알베르는 알게 모르게 기다렸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프린트를 살짝 들어 얼굴을 가렸다. 케일은 눈썹을 까딱였다가 알베르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언제 끝나요?”
“조금만 기다려봐. 곧 끝나.”
“그 말 저번에도 들었었는데요.”
그렇게 말하고 한 시간이나 더 하고 갔으면서. 뚱하게 말을 덧붙인 케일이 의자를 끌어다 알베르 옆에 앉았다. 가방은 언제 내려놨는지 알베르 가방 옆에 고이 놓여 있었다. 빠르기도 해라. 알베르가 프린트로 시선을 돌리고 침묵하자 고개를 저은 케일이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일만 하지 마시고 좀 놀아주시죠.”
“심심하면 집에 먼저 가도 되는데.”
“…일부러 이러는 거에요,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거에요?”
내가 마냥 시간이 남아서 기다리는 줄 아나. 궁시렁거리던 케일이 슬쩍 몸을 기울여 알베르가 들고 있는 프린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만 보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은 알베르는 오히려 케일 쪽으로 파일을 기울였다. 원래라면 외부인은 보면 안 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케일이 아닌가. 알베르는 눈으로 프린트 내용을 훑는 케일에게 말했다.
“나도 바쁘거든?”
“아니, 뭔 행사 준비를 벌써부터 하십니까.”
허.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프린트 제목을 읽은 케일이 질린 투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해야지 언제부터 해. 대답하는 알베르의 목소리가 너무도 당연하다는 목소리라,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발을 굴러 의자를 뒤로 쭉 뺐다. 그리곤 바로 옆에 있는 알베르의 가방을 주워들더니 지퍼를 잡고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심심하니까 선배 가방이나 볼래요.”
“그러든지. …아니, 잠깐만!”
태연하게 대답한 알베르가 우뚝 멈추더니 고개를 휙 돌려 케일을 보았다. 그러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가방 문을 연 케일보다 늦고 말았다. 케일의 시선이 가방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한 알베르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평소에는 책이랑 필기구뿐인 가방이라 별다른 생각 없이 대답했는데, 오늘은 아니라는 걸 뒤늦게 떠올리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보다 초롱초롱해진 눈빛으로 고개를 든 케일이 알베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베르는 눈치챌 수 있는, 확연히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사진도 찍어요?”
“…취미야, 취미.”
“장비는 취미가 아닌 것 같은데. 꺼내도 돼요?”
잠시 고민하던 알베르가 고개를 주억였다. 남의 물건 함부로 다루는 녀석은 아니니까. 케일이 가방 안에 손을 넣어 묵직한 카메라를 꺼냈다. 오늘따라 가방 모양이 이상하다 싶더니, 이거 말고 별 게 안 들어서 그렇구나. 이걸로 사진을 찍는다는 거지. 조용히 카메라를 들고 있는 알베르를 상상하던 케일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쓰는 거에요?”
“거기 버튼 있잖아. 세팅 다 끝내놓은 거라 누르기만 하면 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알려주었으나 끝내 다른 걸 가리키는 케일에, 알베르는 결국 파일철을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가 허리를 숙인 알베르가 버튼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이거라니까.”
나직한 목소리가 케일의 귀에 스며들었다. 살짝 내리깐 눈이 어찌나 시선을 사로잡는지, 케일은 알베르가 알려준 버튼을 냉큼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가 울리고 알베르가 고개를 휙 들었다. 케일은 히죽 웃으며 알베르를 올려다보았다. 알베르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케일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내 카메라니까 지우면 되겠지. 그 눈빛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케일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지우지 마세요.”
“내 카메라거든.”
“그럼 저한테 사진 뽑아주고 지워요.”
“그럼 지우는 의미가 없잖아…….”
그러나 단호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케일의 태도에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알베르가 카메라를 넘겨받았다. 가볍게 카메라를 드는 알베르를 바라보던 케일이 입을 열었다.
“선배가 찍은 사진은 없어요?”
“인화해놓은 거 있긴 한데, 왜? 보여줘?”
의외로 순순한 태도인 알베르에 눈을 깜빡이던 케일이 고개를 주억였다. 알베르로서는 숨길 것도 없어졌는데 뭐 어때, 라는 심정이었을 뿐이었다. 케일이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케일의 품에 있는 가방 안주머니를 연 알베르가 봉투째로 사진을 건넸다. 그를 받아든 케일이 사진을 뭉텅이로 꺼내 하나하나 넘기며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실력이 좋다고 생각하며 사진을 넘기던 케일이 우뚝 멈췄다.
시선을 사로잡는 사진이었다. 새까만 밤 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는 별들이 케일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던 케일은 손가락으로 별을 이어보더니 고개를 들어 알베르를 보았다.
“선배.”
“응?”
“이 사진, 별자리에요?”
뭔지는 모르겠는데 이어지는 거 같아서요. 케일이 들고 있던 사진을 알베르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알베르는 시선을 돌려 사진을 보는 순간,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
“아, 맞아. 처녀자리.”
“처녀자리?”
“그래. 내 탄생 별자리.”
눈을 깜빡이던 케일이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리더니 다시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아까보다 사진 속 별이 더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케일은 그 사진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쁘네요.”
“그거 찍으려고 멀리 갔으니까 예뻐야지, 그럼.”
“어디까지 갔길래.”
“발길 닿는 데까지?”
어깨를 으쓱인 알베르가 카메라를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금방 묵직해진 가방을 내려놓은 알베르가 사진을 흘깃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작년 이맘때쯤에 찍은 사진이야. 처녀자리는 봄에 보이는 별자리거든.”
그럼 1년정도 된 사진이란 말인가. 케일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올렸던 고개를 도로 내리고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이 사진을 스쳐 지나갔을 알베르의 시간이, 그가 알지 못하는 그 시간이 이 안에 담긴 것처럼 느껴졌다. 케일은 미련을 접고 사진을 봉투 안에 넣었다. 그리고 사진 봉투를 알베르에게 내밀며 말했다.
“그럼 지금도 보이겠네요? 한번 보고 싶은데.”
“보면 되지.”
“도시에서는 아무리 봐도 안 보일걸요.”
혼자 보고 싶지도 않고. 뒷말은 속으로 삼킨 케일이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알베르가 케일에게 받은 사진을 가방 안에 넣고 파일철을 정리했다. 케일이 눈을 깜빡이며 그걸 지켜보다가 물었다.
“벌써 가려고요?”
“너 많이 기다렸으니까.”
“와, 이런 날도 오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심 좋은 듯 미소 지은 케일이 자신의 가방을 챙겨 매고 학생회실을 나가는 알베르의 옆에 붙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하교하고 방과 후 활동을 하는 학생들도 돌아갔을 만한 시간이기에 복도는 텅 비어있었다. 둘은 조용한 복도를 걸었다. 겨울의 여파가 남은 계절은 해를 일찍 돌려보냈고, 그 덕에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어둑어둑했다.
학교와 집이 걸어서 갈 만한 거리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렇게 늦게 하교하는 건 힘들었을 것이다. 아직 서늘한 공기를 맞으며 둘은 걸었다. 땅거미가 내린 길가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별 대화 없이 함께 걷던 둘은 같은 아파트로 들어갔다. 케일이 알베르를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옆집에 사니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둘은 마주 보고 있는 문 앞에 섰다. 곧장 비밀번호를 누르는 케일과 달리 잠시 머뭇거리던 알베르가 고개를 돌려 문을 열려는 케일을 보았다.
“케일.”
그 영문 모를 부름에 고개를 돌린 케일이 의아한 눈으로 알베르를 보았다. 노골적으로 할 말이 있다면 빨리하라는 재촉을 담은 눈빛을 보며 웃음을 흘린 알베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별 보러 가고 싶다며.”
“아, 네. 같이 보러 가주시려고요?”
“응. 같이 갈래? 내가 별 잘 보이는 데를 알거든.”
픽 웃으며 대답하던 케일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진짜? 마냥 순수하게 별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던 케일로서는, 오히려 조금 당황스러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알베르의 말에 케일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내가 그렇게 눈치가 나쁜 편은 아니라.”
아, 진짜. 툭툭 끊기는 웃음 소리를 내뱉은 케일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성격 봐. 다 알면서 그랬대.”
“그래서 싫어?”
“아뇨. 좋아요.”
제일 잘 보이는 데로 데려가 주세요. 노력해볼게. 기분 좋은 웃음기가 스민 목소리가 오가고, 둘은 약속한 듯이 마주 웃었다. 들어갈게요. 가볍게 인사한 케일이 집으로 들어가고, 손을 흔들어 보이던 알베르가 손을 툭 떨어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머리카락이 스치는 귓바퀴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