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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악기 못 다뤄요.’

‘괜찮아, 내가 다룰 줄 아니까.’

알베르 크로스만은 불현 듯 떠오른 기억의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잔잔한 수면 아래 애써 가둬두었을 게 분명한데. 눈을 감아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목소리는 제 기억력이 지나치게 좋아서일까, 아니면 그의 목소리가 그만큼 저를 뒤흔들기 일쑤였던 탓일까. 이토록 그리워질 온기라면 마지막에 욕심내어 제 이름 한 번 더 불러 달라 할 걸 그랬다. 모든 감정을 담기엔 좁은 사랑 고백이 아니라, 제 이름 일곱 자에 그간의 애정, 설렘, 설움과 애틋함 담아 불러 달라 했으면 덜 후회스럽지 않았을까 하여.

“케일. …케일.”

누가 들을 새라 소리 죽여 발음에 해보는 이름이 퍽 다정했던 터라 짧은 웃음이 터졌지만 그도 찰나였다. 알베르는 며칠 동안이나 억눌러 왔던 감정이 순식간에 차올라 범람하는 것을 막을 새도 없이 그대로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다.

케일 헤니투스가 별이 된 것도 오늘로 일주일이다.

수많은 사람이 슬픔에 통곡했고 하늘로 향할 그의 길이 평탄하길 바라며 소망했다. 동시에 그들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영웅의 부고 소식을 알리는 황제에게 어찌 그리 멀쩡하실 수 있느냐 묻고픈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곧장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감히 황제의 무던한 낯에 비친 슬픔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아무리 성군이라 할지라도 결국 거짓된 면은 존재한단 것을 모를 이가 어디 있으랴.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조차 연기로 부옇게 흐릴 수 있는 위치이거늘 어찌 황제께선 그런 낯을 하시는지. 냉혈한으로 보일 수도 있음을 모르지도 않으면서 그리 단정하게 백성들의 앞에 선 것이 무색하게도 그 자리에 선 모두가 일렁이는 파도를 목도할 수 있었다. 모두가 밀려오는 슬픔에 오열하는 와중에도 무심히 서 있으면 무얼 하나. 목소리는 심장에서 쥐어짜낸 듯 단어 하나하나에 선혈이 낭자하고 침체된 얼굴엔 고요한 심연만이 그득한데. 그 심정의 일부가 저리 높은 파도라면 더 깊은 곳은 얼마나 너덜너덜 찢어져 있을까.

감히 연인을 잃은 이의 심정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 숙인 백성들을 바라보던 알베르 크로스만은 그 순간에마저 황제로서의 체통을 잃지 않았다. 늘 해왔던 발표는 평소와 다름없었고, 수고했다고 커튼 뒤에서 입 맞춰줄 연인이 없는 것은 평소와 달랐다. 그 차이가 괜스레 심장을 찔렀다.

이후 일주일동안 알베르 크로스만은 정사에서 손 놓지 않고 제 할 일을 해나갔다. 때때로 케일, 하고 주인 잃어버린 이름을 부르거나 제 입에는 그저 달기만 할 뿐인 쿠키들을 집무실에 들이거나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뭐라 말을 건넬 수 없었다. 비탄에 잠긴 왕성은 언뜻 보기엔 고요했지만 그 또한 언제 깨질지 모를 얼음장 같은 것이었다. 그 분위기를 못 읽을 알베르 크로스만이 아니었기에 제게 꽂히는 불안한 시선들을 피하려 일찍이 서류를 끝내고 침실로 향했다. 홀로 눕기엔 지나치게 넓은 침대에 한 사람의 자리를 익숙하게 비어두고 한쪽에 누운 그가 오지 않는 수마를 끌어당겨 이불을 덮어 썼다.

어릴 적에나 하던 짓이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세상이 마냥 날카롭게만 느껴지던 때. 베개 아래에 놓인 단검을 꼭 쥐고서 옅은 잠을 잘 때나 이랬건만 오늘따라 정신이 어지러워 누군가에게라도 기대고 싶었다. 그것이 설령 돌아가신 어머니, 위태로운 어린 시절의 자신, 그도 아니면 제 곁에 없는 연인이라 할지라도. 이젠 모두 형체 없는 것들이 저를 위로해주길 바라며 청한 잠은 그의 눈물마저 훔쳐 꿈결에 빠뜨렸다.

‘저하, 저하.’

온통 새까만 공간이었다. 뭣 하나 제대로 보이는 게 없는 곳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건 숫제 제 몸뿐이라 하염없이 우뚝 서 주위를 둘러보는 게 최대였다. 알베르 크로스만은 문득 오후에 떠올랐던 대화의 뒷내용을 이어 떠올려냈다.

‘괜찮아, 내가 다룰 줄 아니까.’

‘뭐야, 왕세자는 악기도 다룰 줄 알아야 합니까?’

‘교양으로 몇 개 정도는.’

‘그 중 제일 자신 있는 건요?’

‘바이올린.’

‘뭐야, 의외네.’

‘…무슨 의미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의미요. 바이올린도 안 어울리시는 건 아닌데, 좀 더…묵직하고 힘 있는 게 어울리실 것도 같아서.’

한참 곱씹고 있으려니 눈앞에 생겨난 바이올린이 마치 저를 연주해달라 종용하는 것만 같아서. 그제야 아, 꿈이었지 하고 깨달은 양 바이올린을 쥔 알베르 크로스만이 이상함을 느끼지도 못하고서 천천히 활을 들어 현 위에 올렸다. 더듬더듬 기억을 되짚어 무엇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으려니 뒤에서 따스하게 안아오는 손길이 제 손 위에 겹쳐져 멋대로 움직였다.

“아.”

첫 음을 내고 나니 떠올랐다. 이는 네가 가장 좋아하던 곡이었다. 듣고 있노라면 차분해지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푹 쉴 수 있을 것만 같다며 시간이 날 때면 바이올린을 들고 와 어울리지 않게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는 하던 곡. 원치 않은 시작이었으나 그 뒤는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

손가락이 부르튼대도 좋았다. 더 이상 연주를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현이 다 뜯겨 나갈 순간까지 그의 연인을 위해 이 행위를 이어가고 싶었다. 어차피 꿈이지 않은가. 미련한 저를 위해 꿈까지 찾아온 제 연인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도 못 해서는 체면이 서질 않았다.

몇 분이 흘렀는지 모른다. 알베르 크로스만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를 곡이 다시금 끝날 무렵 마지막 현이 기어코 끊기며 제 손에 겹쳐진 온기가 사라진 것을 느꼈을 뿐이다. 그게 아쉬웠던가. 아마도 그러했던 것 같다.

망연히 서 있는 알베르 크로스만은 한 목소리를 들었다.

뒤를 돌아 걸어 나가라. 그리고 빛이 보일 때까지 어떠한 목소리에도 다시금 뒤를 돌아보지 마라.

당장이라도 비명을 내지를 듯 울렁이는 속에 헛숨을 들이킴과 동시에 뒤를 돈 그가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하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신의 자비 하에 기회가 찾아 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폐하.”

길이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어둠 속을 오로지 제 꿈이라는 믿음 하나에 의지하여 달려 나가던 발을 잡아챈 건 다정한 울림이었다.

“…케일?”

“예, 폐하.”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 전 현혹되지 말라던 당부를 잊을 만큼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못 박히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멈춰선 걸음이 그의 망설임을 보여주고 있어서, 일그러져 있을 연인의 얼굴이 훤히 보이기라도 한지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제가 있던 곳에는 신화가 하나 있어요.”

“…….”

“거문고라는 악기를 잘 다루던 이가 연인을 잃자 저승을 다스리는 신을 찾아가 제 연주를 들려주고 그에 감격한 이가 기회를 주었다는 내용이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저승을 벗어난다면 연인을 돌려주겠노라고.”

“…….”

“익숙하지 않나요?”

뭘 멀뚱히 서 있어요. 죽음의 신의 뜻대로 하려고요? 당신이 언제부터 그리 열렬한 죽음의 신 신도였다고.

불경죄를 물어도 부족할 정도의 언사는 틀림없이 케일 헤니투스의 것이었다. 알베르 크로스만은 이 순간 제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울고만 싶었다. 어찌 그런 매정한 말을 하냐고. 만일 신이라면 정말 너를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저답지 않은 생각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감정적으로 구는 것은 기실 이것이 제 이성을 고려치 않은 꿈속이기 때문일 터였다.

“알베르. 나는 죽었어요.”

아, 케일. 나는 네 말 한 마디에 이토록 심장이 아릿해져.

차오른 눈물이 방울져 그대로 떨어졌으나 이것이 어디에 닿아 자국을 남길지는 알 수 없었다. 알베르는 아무렇지 않게 아직 채 여물지 않은 빈자리의 상처를 후벼 파는 그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진실로 미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게 마지막으로 사랑한다 말해주었던 그 목소리로 제 죽음을 알리는 것은 아직 그에게 커다란 슬픔이 될 뿐이라.

“케일,”

“알베르.”

“제발….”

“제가 바라지 않는 생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 나는 천수까지는 아니더라도 행복에 겨워 끝을 맞이했고, 내 곁엔 당신이 있었어요.”

알베르 크로스만은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면 그가 다시 한 번 제 죽음을 입에 담아 제게 비수를 꽂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그러면 형편없이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자신이 없어 더욱이 가만히 있기만 했다. 꿈마저 그에게 너무도 잔인했다.

“저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라도 당신이랑 대화할 수 있어서 기뻐요. 죽음의 신의 짓이라는 게 조금 꺼려지긴 하지만.”

“…내가 이대로 달려 나간다면 어떡할 거야?”

끝이 떨리는 물음에 케일 헤니투스는 말갛게 웃었다. 아마 웃었을 것이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안 그럴 거 알아요.”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어?”

“이 대화의 주체가 당신이고 나인 이상, 우리는 서로보다 더 서로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요.”

웃음기 선연한 목소리에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정말, 잔인하다. 그도 내심 알고 있었다. 케일 헤니투스는 이러한 기회를 통해 주어진 삶을 기꺼워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신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죽음을 돌려놓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저 이렇게 두 사람을 마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할 명분이 필요했을 테지. 그래, 명분. 마치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케일, 케일.”

“제 이름 닳겠습니다.”

“보고 싶어.”

“뒤도세요, 그럼.”

“…네가 사라지면.”

“사라지는 거겠죠.”

순간 욱하는 마음에 고개를 치켜세운 알베르 크로스만이 제 얼굴 앞에 다가온 그리운 적색 머리카락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둠 속에서는 앞과 뒤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앞이라 하면 앞인 거고, 뒤라 하면 뒤인. 그리고 지금은 제가 앞이라 생각하고 내달렸던 어둠이 뒤가 될 차례인 것이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와중에도 보고 싶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잊을 만큼 바라던 것이라 그는 케일 헤니투스를 끌어안아 그 마른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한껏 들이마신 숨은 그를 닮아 부드럽게 단 향이 났다. 애써 참았던 울음이 터질까 입술까지 꽉 깨물고 어리광부리듯 뺨을 부비던 그에게 청아한 웃음이 들려왔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뺨을 감싸 쥐어 고개를 들게 한 그의 연인은 그 언젠가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짓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광경이다. 이 어둠조차 가릴 수 없는 빛이 오롯이 제 앞에 있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다른 사람한텐 시선도 안 줄 테니 걱정 말고 오래 살다 오세요. 그땐 못다 한 어리광 전부 받아줄 테니.”

그 다정한 말에 기어코 멈췄던 눈물이 새어나왔다. 손바닥에 입술을 묻은 알베르 크로스만이 웅얼거리듯 속삭였다. 애원에 가까운 투다.

“케일.”

“네.”

“이름, 불러줘.”

슬며시 다가온 온기가 입술 위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흐려졌다 다시 선명해지는 시야에는 여전히 태양 같은 연인이 있어 알베르 크로스만은 결국 우는 와중에도 입매를 말아 올려 웃었다. 어찌 네 마지막 기억에 우는 얼굴을 보여줄 수 있을까. 부디 네가 좋아하던 내 잘난 얼굴의 잘난 웃음이나 보고 가라. 그 생각을 엿본 듯 다시 한 번 입술을 맞춘 케이 헤니투스가 읊조렸다.

“알베르.”

이제 일어날 시간이에요. 영원한 잠에 들 때 다시 만나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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