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톡.
왕궁 화원에 심은 어느 나무에 가는 물줄기 하나가 떨어졌다. 어린아이가 피아노 건반으로 장난을 치는 것처럼 톡, 톡,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이윽고 바닥에 깔린 고른 잔디 아래 땅까지 고르게 젖어 든다. 조금 과장을 보태 말을 놓자면 이 거센 빗줄기 소리가 폭포 소리와 비슷하다. 그만큼, 로운 왕국에 큰 비가 내렸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 오늘은 비가 내리겠군. 광장 거리를 하릴없이 걷던 로운 왕국민이 지나가다 그리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오늘은 아침부터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으니까. 조금 뒤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그 정도의 오차는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새카맣군. 그럼에도 왕세자, 그러니까 알베르 크로스만이 집무실에 놓인 책상을 뒤로 하고 넓은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물론 맑은 하늘에도 비가 내릴 수 있으니, 이처럼 먹구름이 가득하면 비가 아니라 태풍이 몰아쳐도 이상할 것이 없다. 없지만, 오늘은 특히 과하다 여겼다. 오롯이 새벽하늘만을 담았다 해야 할 알베르의 눈동자에 검은빛이 들어찼다. 본래 모습인 다크엘프로 돌아갔느냐고? 절대 아니다. 그의 침실에서도 변장을 쉽게 풀지 않는데 집무실은 오죽 하겠는가. 집무실 조명등을 모조리 켜 놨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알베르의 눈동자는 물론이고 그 머리색 또한 검게 보였으리라. 서대륙 그 모든 땅바닥을 적셔야 만족하고 돌아가겠다는 듯 검은 하늘 아래 많은 비가 세차게 내렸다.
알베르 크로스만은 감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무언가의 안배였는지, 아니면 순수하게 그가 갈고 닦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알베르는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의 감은 꽤 많은 곳에서 유용하게 쓰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그의 감이 지금, 알베르에게 말하고 있었다. 조만간 큰 일이 날 것이라고. 저 비는 메인 디쉬를 위한 에피타이져 같은 것이라고. 때문에 알베르는 서류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안하다. 그것도 엄청!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알베르가 이것을 어찌 할 생각은 없다. 아니, 있고 없고 이전에 자연은 알베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거기다 왕세자라는 자가 고작 비 내리는 것에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면 누군가는 조소를 흘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베르는 후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박할 이유가 하나 있었다. 알베르는 로운 왕국 왕세자다. 그것도 차기 왕으로 등극할 틀림없는. 그런 그가 이렇게 불안감을 느낀다? 그에게 이런 감정을 주는 것은 딱 두 가지밖에 없었다.
첫번째는 로운 왕국에 닥칠지도 모르는 위기감이다. 이에 대해서는 로운 왕국 그 국민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겠으나, 그 하얀별을 죽음으로 몰았으니 첫번째 이유로 하여금 알베르에게 불안감을 선사할 만한 것은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그 뒷수습을 벌써 몇 개월째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뭐.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니 남은 건 하나인데. 알베르가 불안을 느낄 만한 이유로 두번째라고 한다면…….
-왕세자야! 나 왔다! 우리 인간이랑 누나랑 형이랑 같이 왔다! 근데 우리 인간 상태가 좀, 아니 많이 이상하다! 도와줘라!
케일 헤니투스가 무슨 짓을 벌였을 때겠지. 아니면 휘말렸거나.
“…하아.”
알베르는 천천히 책상을 돌아 집무실 문을 나섰다. 공식적인 방문이 아닌 것을 보면 분명 그들은 알베르의 침실에 있을 것이 분명하건만, 알베르는 반대쪽 복도를 향해 걸었다. 알베르를 찾은 것은 케일 뿐만이 아니었다. 그 귀여운 용이 말하지 않았나. 누나와 형도 함께 왔다고. 알베르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쿠키 가지러.
이상하다. 아니, 원래도 이상한 놈이긴 했는데 오늘따라 유독 이상하다. 곱디 고운 알베르의 미간에 주름이 접혔다. 그 시선 끝에 제가 가져온 쿠키를 두 손, 아니 두 앞 발로 집어 야금야금 먹는 귀여운 용, 아니 라온 미르와 온 홍이 있었다. 그리고, 케일 헤니투스도 함께. 이상할 거 없지 않느냐고? 아니, 이상하다. 이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면 알베르에게 이상한 일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케일?”
“뭡니까?”
너, 꼴이 왜 그래? 알베르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을 집어 삼키며 눈을 부볐다. 과연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그’ 케일 헤니투스가 맞나 싶어서. 이곳은 응접실도, 집무실도 아닌 침실이다. 안쪽에 작은 테이블이 있기는 하지만 알베르가 앉을 의자 하나를 빼면 저 넷이 모두 앉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밖에 없는 의자에 구겨 앉느니 차라리 성인 셋은 거뜬히 누울 알베르의 침대 위를 당당하게 차지한 것까지는, 그래 뭐 좋다. 불경하긴 하지만 한 놈은 이미 불경의 끝을 내리찍은 지 오래고, 다른 하나는 그 위대한 용이 아니던가. 그 둘이 침대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는데 그들의 가족인 묘족 두 마리가 함께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무리 위대한 용이고 독과 안개를 쓰는 묘족이라지만 한참 어린 애들이니 간식을 먹다 부스러기를 흘려도, -비록 그 흘린 곳이 이 왕국의 하나뿐인 왕세자의 침대 시트 위라는 문제가 있지만- 그럴 수 있다 여겼다. 더러워진 시트나 바닥은 청소하면 될 일이니까. 근데 이것만은 정말 모르겠다. 아니, 사실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셋쯤 될 것 같지만 일단은.
“왜 그렇게 붙어있는 거지?”
알베르의 침대는 로운 왕국에서 두 번째로 클 것이 분명한데. 저렇게 서로 붙어먹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단순히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는 것이 아니다. 왕세자의 집무실 소파에도 드러눕는 녀석이 그의 침대에 누웠다고 더 놀라지는 않았다. 그건 이미 훨씬 예전에 겪었다. 케일 헤니투스가 라온 그리고 온, 홍을 모두 끌어안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도 모자라 그 부드러워 보이는 털과 날개 달린 등에 얼굴을 마구 부비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운 것이 케일이 아니라 동물이나 인형을 몹시 좋아하는 어린아이라면 또 이해를 하겠는데. 그 짓을 케일이 하고 있으니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더군다나 세 마리는 그 사이에서 알베르를 바라보며 쿠키를 먹고 있다. 저를 쳐다보는 세 마리의 눈빛이 제각각 달랐다. 한 마리는 그저 좋다며 쿠키를 먹고 있을 뿐이지만, 또 한 마리는 좋지만 어딘가 갑갑하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미 포기했다는 심정으로 애처롭게 알베르를 바라보고 있었고. 일단 마지막, 온의 눈빛으로 케일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 알베르가 침대로 다가섰다.
“…애들이 숨 막혀 하는 것 같다만.”
움찔. 알베르의 말에 케일의 몸이 크게 떨렸다. 그리고는 새초롬한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본다. 아니, 내 잘못도 아닌데 그렇게 본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케일의 반응에 품에 안겨 있던 온이 아주 조금 발버둥을 치자 머뭇거리다 슬쩍 아이들을 안고 있던 팔이 풀렸다. 폴짝. 케일의 옆구리에서 벗어난 온이 기지개를 쭉 폈다. 케일이 저러니 멀찍이 아예 떨어질 만도 한데, 온은 그러지 못하고 케일의 머리 위에서 다시 알베르를 쳐다볼 뿐이다. 케일이 제 품에서 벗어난 온을 쓸쓸하게 바라본다.
알베르는 생각한다. 케일이 세 마리를 아끼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애정표현을 이렇게 격하게 드러낸 적이 있나, 하고. 수 초도 지나지 않아 답을 내렸다.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알베르의 물음은 케일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곁에 있는 케일을 신경 쓰면서도 알베르를 힐끗 바라보는 세 마리에게 물은 거지. 이유야 간단했다. 케일 헤니투스가 알베르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케일보다는 다른 세 마리가 알베르에게 답을 안겨줄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도 이유를 모르겠다! 아침까지는 이러지 않았다!”
“저주나 다른 것은 아니라고 그러셨어요.”
“우리에게만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데!”
그제서야 세 마리가 하나씩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만 이러는 것이 아니라면?”
알베르가 그 중 가장 궁금한 부분에 대해 더 묻자, 아이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케일의 집사 론이나 최한, 에르하벤, 잠시 저택에 방문한 로잘린 외에도 평소 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해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고. 낮 동안에 무슨 일이 있던 것도 아니고, 케일은 왕궁에 도착하기 전까지 헤니투스가 저택을 나선 적도 없기 때문에 아무도 원인을 알 수 없어 이렇게 알베르를 찾았다는 이야기였다. 셋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제 할 일을 해야 하기도 했고, 또 다른 이유가 없었는지 알기 위해 저택에 남았다고 한다.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알베르가 고개를 든 것은 어느 시선 때문이었다. 라온과 홍을 가득 끌어안은 채로 케일이 알베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대답에 알베르가 다시 세 마리를 바라보았다. 아니, 잠깐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알베르의 물음에 아이들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저한테는 평소와 똑같지 않습니까.”
케일 헤니투스가요. 덧붙이지 않아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말에 아래에서 헉 소리가 들렸다. 조금씩 차이는 있어도 비슷하게는 케일에게서 애정 표현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놈이 알베르에게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는 것에 위화감이 들었다. 물론 알베르 자신이 케일의 사람에 속한다고 하면 그건 조금 이상할 일이지만, 그래도 케일-알베르와의 친분은 그의 사람들 못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같은 위화감을 느낀 것이 알베르 뿐만은 아니었는지 세 마리, 그리고 한 사람의 눈동자가 케일을 향했다.
“…왜?”
케일의 말에 직감했다. 알베르에게는 케일의 그 애정 표현이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와 함께 섭섭한 기분도 함께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서 알베르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케일, 지금 네 상태에 대해 짐작가는 바가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럼 오늘 일과를 말해 봐.”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던 케일이 차츰 입을 열었다.
비가 오는 소리에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깼고, 늦은 아침이라 해야 할지 이른 점심이라 해야 할지 모를 식사를 하고, 아이들과 과일 좀 먹고. 그 김에 애들이 사온 디저트도 좀 먹고.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 잠깐 낮잠도 자고. 오래간만에 온 로잘린과 일 얘기도 나누고. 최한에게 에르하벤님이나 라크를 비롯한 늑대족에 대해 묻고.
“별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만.”
확실히, 케일의 말만 듣고 있으면 한가로이 백수가 하루를 보낸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중간중간 다른 이들의 이름이 튀어나올 때마다 라온과 온, 홍이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 때도 이상했다고 말을 덧붙인 것을 빼면 말이다.
“그래, 저주는 아니라고 했지?”
“에르하벤님이 직접 봐주셨으니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럼 정말 뭐라도 잘못 먹은 건가?”
이상한 건 안 먹었는데요. 입술을 모아 꿍얼거리는 케일을 본 알베르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그럼 그 옷차림은?”
알베르가 처음 침실로 들어와 케일을 보았을 때, 가장 위화감을 느꼈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백작가, 아니 공작가 자제라고 하기에 케일은 늘 깔끔한 검은색을 베이스로 한 단조로운 의상만을 골라 입었으니까. 알베르가 보지 못한 곳에서라면 또 몰라도, 적어도 그의 앞에서 케일이 화려하게 치장했을 때라고 한다면 기껏해야 왕궁 연회 때 보았던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그것도 옷 색이 밝다 할 뿐이지, 다른 가문 자제들과는 역시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평소 하지 않던 악세사리까지 착용해 가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지금 케일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공작가 자제였다.
“뭐 잘못됐습니까?”
불경스럽기 그지없는 말에 알베르가 온을 바라보았다. 도리도리. 작은 머리가 좌우로 돌아간다. 자신도 이유를 모른다는 의미다.
“외출한다고 하니까 그랬다는 건데!”
“왕세자야!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인간을 반짝반짝하게 꾸미는 모습은 처음 봤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조한 알베르가 잠시 눈을 돌린 사이, 무언가를 놓쳤다. 이를 알지 못한 알베르가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똑똑. 알베르의 시선을 부른 노크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렸다.
“저하, 헤니투스가家에서 사람이 도착했습니다.”
알베르가 케일을 힐끗 바라보았다.
“응접실로 안내하게. 금방 가지.”
아무리 그래도 다른 이를 왕세자의 침실로 들여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케일과 저 세 마리는 예외로 두고 말이다.
*
“어서오십시오.”
응접실에 울린 정중한 말의 주인은 알베르였다. 그의 공간에서 그 자신이 이렇게까지 점잖게 상대를 대하는 것이 이상하다 여길 일일지 모르나 알베르도 그 인사를 받은 상대도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상대는 고룡 에르하벤이었으니까.
“직접 오셨다는 것은, 케일을 고칠 방법을 알아내신 겁니까?”
모두의 눈동자가 케일을 향했다. 케일의 무릎 위에는 침실에 있었을 때와 달리 라온 하나만이 앉아 있었다. 온, 홍은 얌전히 그의 옆에 앉아있다.
“난리도 아니었지.”
에르하벤은 말과 함께 응접실 소파 가운데에 놓인 테이블에 손수건으로 싼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쿠키?”
알베르는 무심코 케일 주변의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케일과 마찬가지로 단 것을 좋아하는 세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에르하벤이 내려놓은 쿠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쩐지 알베르에게는 맛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나, 에르하벤에게서 나온 것이 쿠키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굳이 말하자면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눈이었다.
“별 쿠키다!”
“아닌데! 이건 화살자리의 쿠키랬는데!”
“맞다는 건데! 쿠키 이름이 큐피드의 화살이라고 했다는 건데!”
“…무슨 이름이 그래?”
알베르가 황당한 눈빛을 짓자, 세 마리가 동시에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일단 아이들은 이 쿠키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이 녀석들이 아무 생각 없이 사온 걸 케일이 먹은 거지. 별자리를 모티브로 한 쿠키라고, 그에 맞는 마법을 조금 담은 것 같다. 영구적인 것은 아니라 내일이면 곧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그래서… 이렇게 애정표현이 격, 아니 과해졌다는 겁니까?”
“그런 거지.”
“돌겠네.”
알베르의 발언에도 아무 반응 없는 것이 과연 고룡이라면 고룡다웠다. 슬그머니 케일에게서, 아니 두 사람과 고룡에게서 멀어지는 아이들의 등에 에르하벤의 목소리가 꽂혔다.
“반성해라.”
“저, 전혀 몰랐다는 건데….”
“인간이랑 나눠 먹으려고 사온 거였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허이구.”
알베르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도 꼬리를 마는 세 마리를 보며 케일에게로 고개를 들었다. 응? 케일의 시선이 알베르에게 닿아 있었음을 알아차린 알베르가 물었다. 아니, 물으려고 했다. 그래도 뭔가 이상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케일은 제게 아무렇지 않았습니다만.”
“…모두에게 효과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야.”
잠시 뜸을 들이던 에르하벤이 입을 열었다.
“친분 정도에 따라 아예 안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날 수도 있고. 설명서에는 그리 적혀있더군. 하지만 너는…….”
에르하벤은 잠시, 왕궁에 도착하기 전 보았던 쿠키와 함께 들어 있었다던 안내문을 떠올렸다.
하나, 화살자리의 쿠키는 평소 친분을 두던 이들에게 한정하여 평소보다 더한 애정표현을 이끌어냅니다. (단, 평소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는 사람의 경우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 화살자리의 쿠키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먹은 이가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대상의 연령이 너무 낮은 경우.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상대에게는 효과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셋, 이벤트성으로 제작된 별자리 쿠키의 효과는 12시간동안 지속되며 이후 본래대로 돌아옵니다.
‘…케일이 이 녀석을 사랑한다고?’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에르하벤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베르는 눈을 깜빡였다.
“에르하벤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들 에르하벤이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케일의 일이니, 그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 남의 연애사에는 괜히 끼어들지 않는 게 맞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르하벤은 그만 돌아가겠다며 케일, 그리고 세 마리와 함께 돌아갔다. 혹시 모를 미래에 헤니투스가家에 어떤 바람이 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
응접실에 홀로 남은 알베르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케일 일행이 헤니투스가로 돌아갔음에도 알베르는 자리에서 떠날 생각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고요하다. 창 너머로 비치는 황혼에 어느새 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지나갔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알베르의 귀 끝이 붉다.
단지 황혼 때문은, 아니었다.
알베르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 보았던 케일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제 침대에 붉은 머리카락을 어지럽히며 누워 있는 모습이 예뻤다. 그의 주변에 다른 아이들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 자리에서 휘청거리는 다리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 앉았으리라. 사령관 복은 그렇다 치고, 그 많던 모던한 옷은 죄 어디 가고 그렇게 치장을 해서는! 못 보던 새 옷을 케일이 입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갖춰 입은 케일의 모습이 알베르 크로스만의 눈을 사로잡을 정도로 어여쁘게 보였다는 사실 때문이지.
“…돌겠네.”
알베르는 케일이 제게 보인 태도를 두고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그렇지 못하다 여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알베르가 케일과 형동생을 운운할 정도로 친분을 두고 있다는 것은 두 말할 것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케일은 알베르에게 평소와 같이 대했다. 왠지 모르게 거리가 벌어진 기분에 좋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두고 내색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반대로 케일이 아이들이나 다른 이들에게 한 것처럼 알베르를 대한다면 아무리 알베르라고 하더라도 참지 못할까 봐. 안심하면서도 혹시, 케일이 돌연 제게 보여줄까 봐. …알베르가 그렇게 바라던 것을. 그래서 등 뒤로 돌린 손으로 허벅다리를 꼬집어가며 참았다. 저것은 사실이 아니니 동요하지 말라고. 케일 헤니투스는 알베르 크로스만을 사랑하고 있지 않노라고.
……알베르와는 다르게.
알베르는 기운 없는 모습으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감정이 어떠하든 간에, 그는 왕세자로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으니까.
*
부스스, 졸음이 채 가시지 못한 채로 눈이 뜨였다. 암갈색 눈동자가 몇 번 구르더니 제 품에 안겨 있는 세 마리를 응시했다. 그것을 두고 갑갑하다 여길 새도 없이 케일 헤니투스가 손을 들었다.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어제 있던 일 때문이다.
케일은, 김록수는 남에게 제 속을 쉽게 표현하지 않는 이였다. 그런데 저 자신이 어제 보인 그 추태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저를 데리러 온 에르하벤을 비롯한 이들에게 그 답지 않게 활짝 웃으며 늘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는 것에 고맙다 말한 것이나, 사는 게 최고라며 온갖 건강식을 챙겨준 일, 슬슬 새 검을 사야 하지 않냐며 다른 사람을 함께 보내 무기점을 돌게 한 일, 그리고 가지고 있던 마정석을 무리하게 내어준 것에 그치지 않고, 어쩐지 물이 불어나듯 떠오르는 세 마리를 처음 보았을 때의 기억에 부족했을 보호자의 애정을 보여준 것까지.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조금쯤 부끄럽지 않았느냐 묻는다면 어느 정도 동의할 수는 있으나 못 견딜 정도는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빌어먹을 쿠키의 효과 탓에 평소 입지 않던 옷까지 갖춰 입어 가며 알베르 크로스만을 만나러 갔다. 그에게 꾸며 입은 제 모습을 보여주려고.
“망할.”
왕세자의 침대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던 알베르의 눈을 기억한다. 그 뒤 아무렇지 않게 저를 바라보던 것까지도. 그때 케일이 느꼈던 것은 무엇인가? 실망이었다. 이건 꼭, 케일이 알베르의 반응을 기대했다는 말이 되지 않나. 분명 제 몸인데도 불구하고 시선 끝에 알베르 크로스만을 계속 담았다. 그리고는 그가 이쪽을 돌아볼 때, 케일은 눈을 피했다. 꼭 들키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 어제, 케일이 알베르에게 보여준 하나 하나의 행동이 모두 다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케일 헤니투스는 알베르 크로스만을 사랑하고 있다고.
케일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돌려 베개에 묻었다. 하필이면 그 왕세자에게. 그 눈치 빠른 인간이 제 행동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전부는 아니어도 필히 케일의 행동에 대해 두고두고 놀려 먹을 것이 분명했다.
효과가 다 사라진 지금, 침대에 누운 저를 내려다보던 알베르 만큼이나 케일은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알베르 크로스만을 사랑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케일은 속으로 ‘아니야, 아닐 거야.’를 중얼거렸다. 이전부터 알베르를 보며 느꼈던 묘한 감정이 설마 그 사랑은 아닐 거라고 부정하면서.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