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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밖에 내지 않는다 하여 없어지지 않는 말이 있다. 김록수는 수차례 혀 위에서 노니는 활자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단어를 이루고 흩어지는 것을 가만히 관망했다. 아주 옅은 숨에도 그것들은 바람 위에 올라타 저들끼리 붙어댔다. 단어가 된 이들은 도로 흩어지기 이전에 저와 비슷한 처지의 단어와 손잡아 종국에는 기다란 문장이 되니 이렇게 한 번 짝을 찾은 것들이 어찌 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여 없던 것이 될 수 있을까.

혓바닥을 빼곡히 채운 것은 꽤나 날카로운 것이라, 처음에는 단순히 따끔하고 말지라도 후엔 결국 피를 보게 될 터였다. 다만 오래 전부터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 상실을 이어온 그에겐 이조차 한없이 무딘 칼날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자각하기에는 그만큼의 오랜 시간이 더 필요했다. 비어 있던 손에 소중한 것을 쥐고, 그것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우며 끝내는 웃을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록수야, 김록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렇게 평안히 제 곁에 있어주는 이의 얼굴을 마주볼 수 있을 만큼.

“그냥 쉬고 있었어.”

“에이, 거짓말 하지 마. 내가 널 얼마나 봤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 얼른 고민이 있으면 이 형에게 물어보렴.”

“형은 무슨.”

헛소리라도 들은 사람 마냥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는 얼굴이 평소보다 풀려 있음을 못 알아볼 일 없는 최정수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다가 그의 맞은편에 앉아 본격적으로 얼굴을 여기저기 뜯어보기 시작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첫 만남에서부터 별반 달라진 게 없는 인상이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이러니 사람들이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저를 통해 뭘 전달하려 하지. 턱을 괴고 불만스레 눈썹 사이의 간격을 좁히던 그가 흥, 하고 바람 빠지듯 가는 숨을 내쉬며 미간을 폈다.

“너 그거 또 옆 부서 일이지?”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무리하다가 쓰러지면 나만 팀장님한테 혼난다고.”

최정수는 김록수가 얼마나 이타적인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치 부나방 같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지시를 내리는 것이 익숙하나 결국은 감정에 휩쓸려 제 몸을 아낄 줄 몰랐다. 그래, 찬란한 불빛에 눈이 멀어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김록수는 희망 아래 날개를 펼쳐 달려들었다. 그 희망이 저를 좀먹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바보같이.

그래서 내가 계속 지켜보고는 있지만.

제 눈빛이 너무 뜨거웠던 탓일까. 서류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김록수가 고개를 들어 최정수를 향해 뭘 그렇게 보냐는 것처럼 눈짓했다. 잠시 가라앉았던 기분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듯 희게 웃은 최정수가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들기며 관심을 그러모았다. 그는 언제나 김록수의 관심이 기꺼웠다.

“이제 밤인데 퇴근하자.”

“이것만 보고.”

“그거 다 보면 또 ‘이것만 보고.’라 할 거 다 알거든.”

“…….”

말없이 고개를 돌리는 것에 담긴 것이 긍정임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김록수는 오늘따라 제게 들러붙는 동기가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평소보다 들뜬 것 같으면서도 눈동자에선 옅은 걱정이 묻어나오는 걸 보면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데. 무심코 돌린 고개는 마침 창문이 위치해 있던 터라, 그의 말대로 흑단처럼 새까만 밤이 펼쳐진 하늘을 마주할 수 있었다. 분명 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었을 텐데 시간 참 빠르게 흘러가기도 하지.

피곤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가 아는 최정수는 고집을 꺾을 리 없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멈추는 게 옳았다. 느긋하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의 최정수가 거들어주겠다며 손을 뻗어왔다. 둘만 남은 사무실에선 가벼운 소음을 제외하고서는 침묵의 연속이었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내려앉은 공간에서 최정수는 종종 김록수를 바라보았고, 김록수는 그보다 더 드물게 시선이 얽혀 들 때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뭘 봐.”

이렇게 말하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그러면 최정수는 매정하다며 우는 소리를 내고는 김록수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은근히 기대어왔다. 그럴 때면 지나치게 좁혀진 거리감이 속삭이는 경고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김록수는 터벅터벅 거리를 울리는 발소리를 무시하며 흘끗 옆을 바라보았다. 혓바닥이 욱씬 아파왔다. 무언가 내뱉지 못한 말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아파오곤 하는 감각을 애써 무시하자 제 말을 듣고 있기는 하는 거냐며 조잘대기 시작하는 목소리가 한껏 가까워진 거리에서 들려왔다.

“아, 혹시 받고 싶은 거 없어?”

잠시 집중하지 못한 새에 홀로 너무 멀리도 갔다. 물론 기억을 되짚어본다면 금세 떠오르기야 할 테지만 보나마나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떠들던 게 전부일 게 뻔한데 굳이 그래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김록수는 야식으로 먹을 만한 게 있던가 하고 제 자취방의 냉장고 사정을 곱씹다가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그건 왜?”

“왜긴. 곧 생일이잖아.”

참고로 난 이번에 아주 비싼 소고기를 잔뜩 먹고 싶어. 최정수는 묻지도 않은 것을 선심 쓰듯 알려주며 애교스럽게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필시 그 곁에 저도 있어달란 뜻이겠으나 김록수는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작년 생일엔 괴수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다음날로 지나가 있었으니 퍽 아쉽긴 했겠지.

늦은 대로 문이 닫히기 전의 빵집에 들러 하나 남은 케이크를 사들고 소소하게 팀원들끼리 축하를 나누긴 했지만 이미 날짜는 지나가버린 것을 어찌할까. 김록수 역시 같은 날을 탄일로 두었지만 그런 것을 딱히 챙기진 않는 성정이었던 탓에 늘 생일의 주인공은 최정수 혼자인 것처럼 슬쩍 뒤로 물러나곤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챘는지 그는 그럴 때면 다른 팀원들과 합세해 김록수에게 고깔모자를 씌워주고 나란히 서서 케이크 위 촛불들을 향해 입김을 불었다. 작년에도 마찬가지였고.

“올해는 제발 눈치 없는 괴수들이 없어야 할 텐데. 안 그러냐?”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다. 괴수들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때에 나타났고 크고 작은 상실들을 안겨주었다. 생일에 대해 주절대고 있긴 하지만 지금 그들이 딛고 있는 세계는 태평히 축하의 말을 나누기엔 험난했으니까.

다만,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는 불 속에서도 빛은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생명은 존재 자체로도 희망이 되었다. 다른 이들은 시시콜콜한 기념일들이라면 모를까, 하나같이 생일은 챙기려 들었다.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안타까움과 반가움, 그리고 애정이란 무너진 세상에서조차 행복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최정수도 이러는 것이리라. 너와 나의 생일이 부디 무탈하길. 우리 함께 웃으며 생일을 맞이하여 태어나서 다행이라 다정을 속살거릴 수 있기를.

한참을 대꾸 없이 길을 걷던 김록수가 조용히 혀를 짓씹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낯간지러운 소리는 그와 거리가 먼 것이었다. 결국 오래지 않아 도착한 자취방 앞에서 김록수는 제게 얼른 들어가 보라며 인사하는 최정수를 앞에 두고 예의 그 무던한 얼굴로 말했다.

“올해 생일은 당사자들끼리 보낼까.”

그에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푸, 하고 거센 호흡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 형이랑 보내고 싶었어? 그럼 말을 하지! 팀장님 카드도 훔치자. 생일인데 봐주시지 않을까? 좋아, 그럼 이번에야말로 휴가 내달라고 졸라봐야겠군! 고작 한 마디에도 돌아오는 것은 통통 튀듯 경쾌한 문장들의 연속이라, 김록수는 무심코 새어나온 웃음을 채 숨기지도 못하고 흘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형 소리에 집착해?”

실상 생일 같은 동갑이면서 꼭 형동생을 가릴 일이 있을 때면 저를 형이라 주장하고는 했다. 그게 싫냐 한다면 별 생각 없다는 쪽에 가깝긴 했으나 유달리 심한 오늘은 궁금한 것도 맞아서 김록수는 혓바닥에 박힌 가시들 중 하나를 기어코 뽑아내어 밖에 내었다.

“응? 당연하지. 곧 우리 생일이잖아.”

“그게 뭔 상관이야.”

“생각해보니 우리는 나이도 생일이 같으니까 이건 쌍둥이나 다름없지 않아? 그럼 형동생을 정해야지! 나는 너보다 빨리 태어났을 테니 당연히 형이고!”

말없이 중지를 들어 보이는 그에 최정수는 재미있는 것이라도 본 사람 마냥 웃다가 잘 들어가라며 어쩐지 잘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 조금 더 멀리 있는 제 자취방으로 옮겼다. 그러는 순간까지 기대감에 부푼 가슴이 속삭이는 설렘은 차마 갈무리 하지 못해 입매가 둥글게 휘었다.

올해는, 아주 즐거운 생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김록수 역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날 밤의 대화는 말뿐만 아니라 사이사이의 호흡, 표정, 그리고 내리쬐는 달빛에 길어진 그림자의 길이마저 기억이 날 정도였으니 이보다 확실하게 그때의 설렘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최, 정수.”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산산조각 난 꿈의 편린이 되어 제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쇠 냄새가 지독히도 코끝을 서성댄다.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감각이 느껴지니 이는 필시 저의 피가 맞을 텐데 고작 몇 방울치고는 너무나도 짙지 않나. 마치 사방이 붉은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설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찰나의 과거에서 돌아온 정신이 쥐어짜내듯 고통스럽게 그에게 현실을 고했다.

당사자들끼리 보내자던 생일은 영원히 약속으로만 남을 터였다.

최정수가 그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순간마저 냉정한 이성은 담담하게 제 역할을 다 했다. 김록수는 어쩌면 이 순간을 예견했을 지도 몰랐다. 길드는 도망갔고, 등급 외 괴수를 막기에 그의 팀은 처참하단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약했다. 지원을 기다리기엔 이미 끝을 맞이한 선배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는 이길 수 없다고. 그럼에도 나섰던 이들이었고, 그렇게 제 역할을 다한 채 숨을 거둔 이들이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후방으로서 정확히 현장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러나 언제 신체가 제 마음대로 움직여준 적 있던가. 자꾸만 시려오는 눈 밑에 기어이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야, 내가 나서지 말랬지….”

고작 철판대기 들고, 어? 너 진짜 고집불통이라고…. 최정수는 언젠가 보았던 웃음을 매단 채 희게 웃었다. 맑다는 게 아니었다. 핏기가 가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그러했다. 김록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 밖에 내지 않는다 하여 없어지지 않는 말이 있다. 그는 이제야 아릴 정도로 단 애정에 혓바닥이 아파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피 대신 흘러내리는 것은 차마 밖에 내지 못했던 매 순간의 문장들이었다. 입에 머금고 있는지 너무도 오래 되어 본래의 모양을 잃어버린 것들이 가장 먼저였다. 차례차례 흘러내리던 문장들은 단어들로 쪼개지더니 이윽고 활자로 흩어져 바닥에 닿아 뭉개졌다. 그것이 제 심장의 일부이기라도 한 듯 조각난 것들이 아파 김록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최정수.”

아픈 이름을 입에 담았다.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부를 땐 마치 제 것인 것처럼 그저 편안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너무나도 멀리 있는 것을 잡으려는 듯 아득하기만 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그들의 약속은 아마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 제 생일이 될 때마다 못다 이룬 약속을 떠올릴 것이며, 형이라 해놓고서 먼저 떠나간 동갑내기 형제를 그릴 것이다.

“정수야.”

우리 다음 생에는 정말 쌍둥이로 태어나자. 내가 동생이 되어도 좋으니 너무 짧은 지금 우리 삶 떠올리며 아등바등 토해낸 첫 울음부터 후련히 지어보일 마지막 웃음까지 공유하자. 매해 생일마다 고깔모자 나눠 쓰고 겨울의 초입에서 발갛게 웃어보자.

다음 생에 우리가 정말 쌍둥이로 태어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이 순간 멈춰버린 우리 인연 다시 이어갈 수만 있다면.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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