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 글은 가장 최신화까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으실 때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같은 고등학교. 같은 대학교. 우리 셋의 인연은 다른 이들보다 질겼다.
“아, 귀찮아. 안 해.”
손사래 치는 김록수를 끌고 이수혁과 최정수는 꿋꿋하게 동아리 방 앞에 섰다. 새로 단 것인지 팻말에 「길잡이」라는 글자가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동아리 안 한다니까.”
“부원 부족하니까. 머릿수만 채워줘 인마.”
김록수의 투덜거림을 이미 귓등으로 들은 이수혁은 익숙한 철제손잡이를 돌렸다. 동아리가 밀집한 건물의 꽤 구석진 자리. 녹이 슬어 비명과 같은 높은음을 내는 문은 당연하게도 뻑뻑한 감이 있었다. 그 힘 좋다던 이수혁조차 한 손으로 열지 못해 양손으로 붙잡아 문을 뜯어내듯 밀면 조금 쾌쾌한 곰팡내와 같이 두 평 남짓한 동아리 방이 보였다.
“사람 있다고 안 했잖아.”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최정수가 고개를 들자, 미묘하게 얼굴이 찌푸려진 김록수가 형형한 얼굴로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최정수가 입꼬리를 당겨 씨익 웃어 보였다. 웃음 하나로 단번에 개구쟁이같은 얼굴이 된 그는 곧 사람 좋게 김록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차피 너 동아리 들어오면 다 볼 얼굴인데 뭐!”
전부터 사람을 만나라고 그렇게 둘이서 귀에 피가 앉도록 말하더니 이걸 위해서였나. 킬킬 웃어대며 약간의 들뜸이 보이는 최정수는 기대가 가득한 눈초리였다. 김록수는 그런 최정수의 팔을 치워냈다. 다 볼 얼굴은 무슨. 딱히 낯을 가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김록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싫어하는 축에 속했다. 제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들만 만나는 것.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회생활이었다. 덕분에 김록수의 세상은 편협할 수밖에 없었다. 김록수는 놀란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5명의 사람을 보다 그 옆에 자연스레 앉아있는 이수혁을 향해 퉁명스러운 소리를 뱉었다.
“동아리에 사람 없다면서요.”
“다른 동아리는 12명씩 있는데 여기는 7명이니까 없지.”
“동아리 폐지 되는 건 부원수가 5명 이하일 때잖아요.”
“내가 언제 동아리 폐지된다 했냐? 머릿수가 부족하다 했지. 나까지 하면 7명이야 인마. 나는 짝수가 좋다고.”
당했다. 유령회원이 되어 자유롭게 살려고 했더니 이수혁이 자신에게 사기를 쳤다. 그를 알고 지낸 6년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김록수가 속에서 우러나는 한숨을 내뱉었다. 이수혁과 최정수를 6년간 알고 있는 것이 죄라면 죄였다. 뻑뻑한 뒷머리를 문지르며 신발을 벗었다. 문 앞에 계속 서 있기도 그랬지만 일단 지독한 폭염에 등 뒤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김록수가 대충 반소매에 얼굴을 문질러 땀을 닦아냈다. 덕분에 드러난 팔뚝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고요한 침묵이 감쌌다.
“흉터가 없네.”
반쯤 감겼던 눈꺼풀을 들어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이였다.
“예?”
남자가 뱉는 말투에서 절 아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김록수는 굳이 돌리지 않아도 되는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저렇게 생긴 사람과 대화를 나눈 기억조차 없었다. 이수혁이 고개를 돌려 느긋하게 웃었다.
“진태야, 처음 보는 사람한테 무슨 말이냐.”
6년간 이수혁과 지냈던 김록수는 저 말투가 어떤 기분을 담고 있는지 알았다. 왜 갑자기 화를 내? 비록 그가 자신과 초면인 사람이긴 했다. 그러나 이 대한민국에 평범하디 평범한 자신과 닮은 이는 몇십 명은 있을 터였다. 사람을 착각해 말을 했을 수도 있지. 김록수는 민감한 이수혁을 이상하게 바라봐 주고는 동아리실로 발을 디뎠다. 계절이 단절된 것 마냥 두터운 문이 아까의 기이한 소리를 내며 닫히자 곧장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나름 동아리라고 구색을 갖춘 것인지 에어컨에 달린 스크린에 18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빵빵하게도 틀었네.
“오, 에어컨도 있네요…….”
식어가는 체온에 김록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태생부터 김록수의 몸에는 열이 많았다. 다른 이들이 전생에 혹시 화가 많이 쌓인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뱉었을 만큼 말이다. 김록수는 그 말을 흘러들었다. 흔히 전생에 너는 이러지 않겠냐는 추측성 발언은 많았으니까. 예민한 날에 가끔 이수혁이 싸늘하게 웃으며 손을 매만졌지만, 그뿐이었다. 자연스레 김록수는 에어컨 바람이 직하방으로 내려오는 자리에 앉았다. 애초에 그 자리가 김록수 자리라는 듯 텅 비어 있어 김록수는 힘들이지 않고 그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
문제는 그 순간부터였다. 처음 보는 5명의 사람들이 김록수의 행동 하나하나 주시하며 부담스럽도록 바라보았다. 마치 면접을 보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졸지에 김록수의 행동이 다소곳해졌다. 자연스레 붙은 두 무릎 위로 가지런히 올라간 양손까지 멀리서 보았다면 신입 인턴의 자세라 생각할지도 몰랐다.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최정수는 모르는 척 얼굴을 돌이며 휘파람을 불었다. 잘 부르지 않은 그 형세가 아니나 다를까 불협화음이 흘러나왔다. 김록수는 타깃을 바꿨다.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가장 큰 원흉. 이수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수혁은 온전히 김록수의 시선을 받아내어 오히려 그를 향해 무언가를 바란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굉장히 껄끄러운 기분이 발치를 둘러쌌다. 이수혁의 눈빛은 작은 기대감으로 차 있었다. 6년을 알고 지냈는데 저런 반응은 처음이라 김록수가 어색하게 목을 문질렀다. 바람에 싸늘히 식은 삭갗이 손바닥의 온도와 상극을 이루며 따스하게 변모했다. 결국 김록수가 뱉을 수 있는 말을 몇 개 없었다.
“동아리실 생각보다 괜찮네요.”
이수혁의 눈빛이 실망으로 젖어 들었다.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왠지 모르게 김록수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처들었다. 그러나 정말 꺼낼 말이 없었다. 김록수가 입을 꾹 다물자, 그 사이를 끼어든 것은 최정수였다. 이때까지 자신을 팽개쳐놓고 이제 와 끼어드는 모양새가 얄미워 김록수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자, 이럴 게 아니라 소개부터 해야죠.”
“그렇지 소개를 해야지.”
마치 꿈길을 걸어온 듯 몽롱한 시선이었다. 김록수는 ‘진태’라고 불렸던 이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인상에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기묘한 기시감도. 처음 본 사람이 분명했다. 그래, 분명한데.
“내 이름은 박진태고 경영학과 3학년이야.”
아주 실례되게도 김록수는 박진태와 학과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남을 겉모습으로 평가해본 적이 손에 꼽았다. 그런데 이 박진태라는 남자는 정말로 경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히려 체육계에 가까운….
“무슨 생각해?”
아까부터 저 눈빛. 이수혁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이 거북했다. 마치 저를 두고 다른 이를 투영하는 기분. 김록수는 슬그머니 구겨지는 낯을 관리하려 진땀을 뺐다. 첫인상에 구겨진 얼굴로 괜한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본다고 해봤자 몇 번을 더 보겠나. 기왕이면 무난한 인상으로 남아 있길 바랐다. 김록수의 시선이 박진태 옆의 여성에게 닿았다. 동그란 눈동자는 제법 강단 있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민아고 체육교육과 신입생입니다.”
김민아. 이 대학교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터였다. 체육천재. 도대체 왜 교육과로 왔는지 모르겠다는 체육계 다재다능인. 수석 입학도 그렇지만 그녀가 두각을 보인 건 체육대회의 일이 컸다. 체육의 신이 내렸다는 5월 3일의 그 날. 김민아를 본 이들은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그녀의 뒤에 포세이돈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록수는 헛소리를 하는 제 과 동기의 말을 무시했다. 들어줄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김록수는 체육대회라는 행사에 참여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때의 상황이 어떤지 몰랐다. 생각해봐라, 에어컨 놔두고 웬 바깥이란 말인가. 죽어도 사양이었다. 김록수는 늘 그렇듯 아픈 척을 하곤 먼저 내려가 집안에서 늘어졌다. 간간이 휴대폰에서 또 도망쳤냐고 묻는 이수혁과 최정수의 문자가 떠올랐지만 김록수는 가볍게 무시했다. 어쩔 거야. 내 돈 내고 내가 안가겠다는데. 다음날 김록수는 엄청난 걸 놓쳤다며 안쓰럽게 자신을 두드리는 동기를 가볍게 지나쳤다. 엄청난 걸 놓치든 놓치지 않든 자신이 알 바는 아니었다. 시간표 확인하러 드문드문 대학교 커뮤니티에 들어가면, 핫 게시판 제목에 써 있는 김민아라는 글자에 호오하는 짧은 감탄사만 내뱉었을 뿐이다. 정말 자주 올라와서 대단한 사람인가 보네 하고 넘겼는데 이곳에서 마주칠 줄이야. 졸지에 화제의 인물을 만나 기분이 묘했다. 김민아는 박진태와 달리 거북한 느낌이 덜했다. 올곧은 눈이 눈앞에 있는 이를 명확히 보려고 하는 느낌이 강했다. 원래 이런 아인가. 김록수는 너무 저돌적인 시선에 슬그머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조금 유약해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순 창문에 들어 닥친 빛에 남자 손에 끼워진 반지에 닿아 빛 반사가 일어났다. 빛이 궤적을 그리며 김록수의 눈을 빗겨 갔다. 그러자 온전히 보이는 반지는 디자인으로 보았을 때 커플링처럼 세공이 되어있었다. 깔끔하게 마감된 은빛 링은 심플함이 도드라졌다. 이상하게 익숙해보여 김록수가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이내 쉽게 그 반지를 어디서 보았는지 깨달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김민아 손가락에도 자리잡은 저 반지. 저 반지가 우정링이 아니라면 분명 저 둘은 사귀고 있는게 분명했다. 김록수는 의외라는 눈동자로 김민아를 바라보았다.
“저는.”
실례였을지 몰랐다. 시선을 느낀 김민아와 김록수의 시선이 완전히 합일을 이루었을 때 옆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배푸름입니다, 록수 선배님.”
깍듯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는 불쾌감은 없어 보였다. 김록수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냥 신기해서 쳐다본 건데 혹시 흑심 품고 쳐다본다고 싸움이 났으면 골이 아플 뻔했다. 슬쩍 본 배푸름은 김록수에게 그런 감정은 전혀 느끼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유아교육학과 2학년이에요. 전부터 친해지고 싶었어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김록수는 의아했다. 자신은 그다지 유명한 편이 아니었다. 이수혁과 최정수야 뭐, 원래의 그 사람 잘 챙기는 성격 덕에 주변 이들이 많았다지만 김록수는 정반대에 속했다. 여러 사람이랑 인연을 맺는 것을 꺼려 했다.
“나랑?”
“네.”
순해 보이는 눈망울이 호선을 그리며 접혔다. 굉장히 당황스러운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첫 만남부터 이리도 긍정적이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은 최정수와 이수혁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김록수는 왠지 가슴이 간질거려 목덜미를 주물렀다.
“형님이랑 최정수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라.”
“재미없는 사람이란 건 알아요.”
재미없다고는 안 했어. 순망한 얼굴로 때리다니. 순간 김록수는 얼이 나갔다. 곧바로 저렇게 치고 들어올 거란 생각은 못 했는데. 허나 얼굴로 드러나는 악의적 감정이 없어 차마 저 순순한 낯에 뭐라 할 순 없었다.
“또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아요.”
정말로 이상한 아이였다. 김록수의 시선은 자연스레 김민아로 옮겨갔다. 대체 이런 이상한 남자애의 어떤 면이 마음에 들어 사귀고 있냐는 말이 목젖을 강하게 흔들었지만 그뿐이었다. 김록수는 차마 체육의 신에게 죽을지도 모르는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빨리 통성명을 끝내고 나가자. 김록수는 빠르게 결정했다. 그래서 지체 없이 반대편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백색의 옷을 입고 있는 남자는 연신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뭔데 뭐, 기독교라도 되나?
“믿고 있었습니다.”
김록수의 시선이 일그러졌다. 본능적인 불쾌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저 입을 막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격동적인 감정이었다.
“당신을.”
알고 보면 여기 또라이들의 집합소가 아닐까. 이수혁에게 다시 닿는 시선은 불신에 가득 차있었다. 이수혁은 이 상황이 즐거워 보였다, 아까의 기대감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온전히 이 순간을 즐기는 모습이라 속에서 홧홧하게 불이 타올랐다.
“나중에 봅시다…. 형….”
단어를 으깨어 씹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이수혁은 태연했다. 애초부터 그랬다. 이수혁은 김록수가 다치는 일 말고는 웬만해서 굴곡 없는 기복을 가졌었다. 생각해보니 이수혁부터가 이상한데 이 동아리 부원들이라고 다를까. 빨리 나가고 싶다는 의중을 팍팍 담아 아까의 그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온전히 떠진 눈은 반짝거렸다. 기분 나쁠 만큼.
“저는 주호식입니다, 보석 감정과 2학년이죠.”
말하는 행동으로 보면 영 사이비 쪽에 종사할 것 같았으나 나름 학과는 번듯했다. 김록수는 잠깐 실례 적인 생각을 한 자신을 반성했다. 겉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 김록수는 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이제 한 명 남았다. 마지막 남은 이는 고요한 눈으로 김록수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 혜안이 깊어 외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록수 형.”
아주 잠깐 머리가 아팠다. 누군가 머리를 붙잡고 흔드는 것 같이 골이 띵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록수는 마지막의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칠흙 같이 새까만 머리카락과 장막을 덮은 듯 깊은 눈동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에서는 순한 강아지 같은 이미지가 풍겼다.
“문화제 보호학과 1학년 최한입니다.”
이름이 특이했다. 외자라니. 알았다면 분명히 자신은 기억을 하고 있었을 터였나.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뒤져도 최한이라는 사람은 몰랐다. 그런데 이 기시감은 무엇일까. 자신을 향해 선하게 웃는 터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마치 잊으면 안 되는 것을 잊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과 초조한 마음이 뒤엉켜 김록수는 심란해졌다. 아까부터 드는 이 묘한 익숙함. 분명 처음 보는 낯임에도 피어오르는 애틋함, 안타까움. 그러나 김록수는 그 모든 것을 가볍게 털어내기로 했다. 모든 것은 착각임에 틀림 없었을 테니까. 자신의 기억력이 좋은 편이긴 했으나 능력자도 아니고 모든 것을 기억할 순 없었다. 대충 뭐, 비슷한 이와 헷갈렸겠지.
“나는.”
느긋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7명의 시선이 모두 김록수에게로 모였다.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김록수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수혁 형님하고 최정수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정치외교학과 3학년 김록수야.”
통성명이 드디어 끝났다. 침묵이 내려앉은 동아리방에서 김록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언제나 권태롭게 반쯤 잠긴 눈동자를 끌어올리니 저마다 각색의 표정들이 돌아다녔다. 남의 표정을 읽는 것에 젬병이었지만 이들을 읽기는 비교적 쉬웠다. 감격, 감동, 벅참, 애정, 믿음. 긍정적인 감정들이 들쑥날쑥 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당혹스러움에 이수혁을 바라보았으나 복잡한 표정의 낯과 마주했을 뿐이다. 결국, 김록수는 견디지 못했다. 벌떡 일어서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미안, 곧 수업이 있어서.”
수업 따위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견딜 자신이 없었다. 무얼 보았길래. 그렇게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김록수는 이르게 몸을 일으켜 신발을 구겨 신었다.
“가게?”
최정수가 김록수를 보며 곤란한 듯 웃었으나 그뿐이었다. 잡지 않았다. 염연히 제 시간표를 전부 알고 있을 테지만 정도를 지켰다. 김록수는 뻑뻑한 낯을 문질렀다. 아까부터 드는 기묘한 기시감, 익숙함. 누군가 머릿속에 뿌연 안개를 흩뿌린 것 같았다. 언제나 명확하게 답을 가지고 살던 김록수는 처음으로 이 상황이 답답해졌다. 왠지 이곳에 오래 있을수록 그 기분이 계속될 거라는 직감이 적색경보를 울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김록수는 가볍게 묵례했다. 저마다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오롯하게 최한만이 생각에 잠긴 듯 고요한 눈으로 김록수를 바라보았다.
“안녕히 계세요. 부원 신청서는….”
어느 순간부터 웃고 있지 않은 이수혁을 바라보며 김록수가 짧게 덧붙였다.
“형한테 보낼게요.”
첫 만남은 이렇게 끝맺었다. 김록수는 아까의 그 손잡이를 돌렸다. 역시나 비틀려 꽉 낀 문은 김록수의 악력에 쉬이 흔들리지 않았다.
“왜 안 열려?”
“제가 도와드릴게요.”
등 뒤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남자에게는 풀 내음이 흘렀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옆의 시야를 가리면 뼈대가 도드라진 한 손이 쉽게 문을 열어젖혔다. 이 일련의 동작들이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김록수는 그가 보기와 달리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조차 자각하지 못한 듯 고개를 돌려 최한을 바라보았다.
“최한.”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빠르게 돌아가는 고개에 놀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놀라기는 김록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치 몇천 번을 불러본 사람처럼 외자의 이름이 혀에 감겨 유려하게 굴러졌다. 아까의 껄끄러운 감정과는 별개로 말이다. 김록수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했다. 그도 그럴 게 몰랐던 사람이 친숙하게 이름을 부르다니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그는 손을 들어 최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다.”
일순 강하게 흔들리는 동공이 촉촉함에 젖었다. 그러나 이미 밖으로 나선 김록수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김록수는 태양이 내리쬐는 하늘을 바라보다 이내 열린 문을 잡았다. 그리고 미련 없이 그 문을 닫았다.
“...일님.”
아주 잠깐 그리움에 몸서리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뿐이었다.
***
김록수의 세상은 단조로웠다. 무난한 집안에서 외동으로 자라 무난하게 크며 무난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런 김록수가 유일하게 독특한 일상을 꼽으라 하면 하나는 이수혁을 만난 날일 것이고 하나는 최정수를 만난 날이었을 테다. 그도 그랬다. 처음 보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밥은 먹고 다니냐.”
이수혁은 자신보다 한 살 많았다. 학창 시절에 한 살 차이라는 것은 꽤 큰 권력이라 김록수는 움츠러들 것 같은 어깨를 빳빳하게 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 밥을 잘 먹고 다니지 못하면 패겠다는 건가?
“저 지금 가진 돈이 만원밖에 없어요. 이걸로 퉁치는 건 안 될까요.”
이수혁은 김록수의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박이다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허리를 꺾어 웃는 얼굴이 정말 즐거워 보여서 김록수의 낯이 스스로도 모르게 뚱해졌다.
“내가 돈 뺏는 것처럼 보여?”
아니, 그럼 후배한테 무슨 볼일인데. 마의 성지라고 불리는 남고에서 구태여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그것 말고 설명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여자도 아니고 얼굴 보겠다 찾아온 것은 아닐 것 아닌가. 김록수는 앞의 생각을 입으로 뱉고 싶었지만 정말 얻어맞을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아무리 겁을 상실해도 적당히 어디서 다물고 살아야 하는 눈치는 있었다. 그렇게 이상한 첫인상과 다르게 나중에 이수혁은 김록수의 친 형같은 사람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록수가 어딜 가든 이수혁이 있었다. 이 지역 고등학교 일대에서 유명한 이수혁이 김록수를 따라다닐 이유는 하등 없었음에도. 간혹 약점이라도 잡은 것이 아니냐는 소리들이 들렸지만 억울했다. 멀찍하게 떨어지려고 하면 탄탄한 팔이 김록수의 목에 둘러졌다.
“어딜 멀어지려고 해. 섭섭하다.”
진심으로 서운한 것이 느껴져 김록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스스로도 이상했다. 그냥 팽하고 다니면 되는 것을 서운하다고 또 한숨 쉬고 아니라고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방학 때 뭐하냐.”
“집이요.”
“넌 인마, 집 좀 나와서 돌아다녀. 몸 비실비실한 거 봐라.”
“제가 형인 줄 알아요?”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이 다니는 모습은 그렇게 익숙한 것이 아니라서 주변의 동급생들이 나에게 사실 일 년을 꿇은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내가 뭘 일 년을 꿇어. 그렇게 삭아 보이냐?”
“어.”
장난처럼 대답하고 킬킬 웃는 반 친구의 언행에 김록수에 빌어먹을이라는 소리를 나직하게 맺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김록수의 삶에 이수혁이 익숙할 때쯤 2학년 때 최정수가 전학 왔다. 태생 곱슬이라 주장하는 머리카락은 자연 갈색이어서 그런지 한층 부드러워 보였다. 첫인상부터 편안한 축. 김록수가 보았던 최정수의 이미지는 그랬다.
“자자, 록수 옆이 비었으니까 저기 앉으면 되겠네.”
우연처럼 제 옆에 배정되어 앉은 최정수는 김록수를 보며 놀란 듯 눈을 껌벅이다 이내 활짝 웃었다. 양옆으로 벌어지는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입술 틈 사이 가지런한 치아가 보였다.
“안녕, 난 최정수야. 넌 이름이 뭐야?”
밝은 에너지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김록수는 개구지게 웃는 최정수를 보며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김록수.”
“그래, 김록수구나.”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최정수는 한동안 그 이름을 되뇌었다. 최정수와 이수혁이 친해지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체감으로는 1초 정도일까. 만나자마자 서로 커지는 눈동자에서는 반가움이 묻어났다. 가운데 낀 김록수를 본체만체하며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시시덕거리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렸다. 그렇게 김록수의 인생에 최정수도 끼게 되었다.
김록수는 아주 잠시 과거를 회상하다 벤치에 널브러지듯 앉았다. 고작 사람 5명과 통성명을 했을 뿐인데 지쳤다. 벤치를 절묘하게 가린 나무의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며 범위를 매 순간 다르게 움지였다. 어떨 때는 무릎 위에 햇볕이 내려앉다가도 정신을 차리면 신발에 햇볕이 닿았다. 고요함. 김록수는 잠시 세상이 주는 고요함에 녹아내려 멍을 때렸다. 김록수에게 취미란 몇 개 없었다. 허공을 보며 고요하게 제시간을 가지는 것. 이수혁과 최정수는 선을 밟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런 점은 확실하게 지켜주었다. 그게 김록수와의 인연을 여태껏 들고 올 수 있었던 점이기도 했다. 김록수는 남이 제 생활에 끼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제 사람이라는 바운더리라면 달라지지만 일단 그 영역 안에 들어가기까지가 힘들었다. 배척하는 느낌은 아니었으나 기본적으로 타인과 어울리지 않으니 그 기회를 잡기가 힘든 편에 속했다. 김록수 스스로도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수혁과 최정수는 그런 수고를 굳이 들여 김록수의 세상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이제 와 그 둘을 뺀다고 하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이미 김록수의 추억에는 그들이 한 가득이었다. 휴대폰 갤러리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폴더에 둘의 얼굴이 없는 게 없었다. 웃기게 자는 모습. 술 취해서 엎어진 모습. 놀려줄 거라 찍었던 사진들이 온전히 남아 추억이 되었다. 김록수는 새삼 이 많은 추억은 쌓은 게 놀라워 사진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진을 하나하나 넘길수록 과거의 일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 떠돌았다.
“참나.”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웃긴 사진들에 김록수가 손등으로 입을 막고 작게 웃었다.
“이러다가 직장도 같은 데 구하는 거 아니야?”
회사 같은데서, 막 나랑 최정수는 신입이고 이수혁은 대리, 팀장 정도? 스스로의 생각이 우스갯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학과도 지향하는 방향도 다 제각각이었으니. 그러나.
“나 예지몽 있나?”
사회에 나간 그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품이 넉넉한 셔츠에 핏을 생각한 정장 바지. 그리고….
“칼?”
이 시대에 무슨 칼이지. 연극학과라 그런가. 머릿속을 반짝이던 장면 하나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몽롱하게 흐려졌다. 김록수는 아까 떠오르던 이미지를 다시 떠올리려 했지만 꿈처럼 잊혀서 그럴 수 없었다.
“나 피곤한가?”
일어나서 잔 건가. 그러기에는 순간이 너무 생생했는데. 요즘 그랬다. 무언가 가끔씩 보이는 그 순간들. 분명 너무도 익숙한 광경이었으나 다시 되짚어보려 하면 연기처럼 흩어졌다. 사실 이수혁을 만난 그 순간부터 시작된 이 현상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재앙 같은 꿈을 꾸어 일어나면 분명 그 끔찍했던 기억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남는 것은 찝찝함과 답답함. 김록수는 머리를 빡빡 문질렀다. 분명 생과 사를 오가는 긴박한 상황 속이었던 것 같은데. 메모를 해서 적어두려고 해도 남는 것이라고는 감정뿐이니 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건조한 얼굴로 김록수가 제 무릎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그가 두드린 색 빠진 청바지는 김록수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입고 다니는 이유는 생일 선물로 최정수가 사다 준 옷이었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붙잡혀 들어간 곳 옷집.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곳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옷들에 김록수는 질색하면서도 피팅룸에서 갈아 입어주었다. 자신의 생일이면서 최정수의 생일이기도 했으니까. 옷 사주는게 소원이라는 그의 말에 김록수는 무엇도 말하지 못하고 벗었다 입었다하는 행위를 반복해야했다.
김록수는 새삼 자신과 생일이 같은 최정수가 신기해졌다. 11월 8일. 자신과 생일이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확률로 치면 그렇게 높지 않은 수치인 것은 확실했다. 김록수의 인간관계는 좁았으니까.
‘너 내일 생일이지.’
문득 학교에서 물었던 질문에 김록수는 얼떨떨했던 기억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내가 말한 적이 있었나?’
‘...물론이지.’
어색하게 웃는 낯짝이 의심스러웠으나 자신의 생일을 안다고 해서 불이익이 오는 것도 아니라서 김록수는 그러려니 하며 그때 상황을 넘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네.”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자신은 묻지 않는 이상 생일이 언제인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태생부터가 남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남들과 비슷비슷한 일생을 구태여 입 아프게 말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최정수는 어떻게 안 거지?”
꿈과 방금 느꼈던 기시감에 예민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전부 우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형도 내 취향 잘 알고 있지 않았나?”
밥을 먹으러 가면 항상 김록수가 좋아하는 삼겹살집이었다. 솔직히 건장한 20대 남성 중 누가 고기를 마다하겠나 싶었지만 그랬다. 생각해보면 기가 막히게도 이수혁은 김록수의 취향을 잘 때려 맞췄다.
“뭐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록수야.’
아주 잠깐 강렬한 기억이 범람했다. 1초의 짧은 순간.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 흰 셔츠가 피와 땀에 젖어 군데군데가 물들었다. 살결도 각화된 피부 덕에 이곳저곳이 흉터가 져있었다. 무엇보다.
“목소리.”
지금의 이수혁이 나이를 더 먹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다시 현실에 나동그라진 김록수는 먼지가 내려앉은 벤치의 어느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지문 틈새로 빡빡하게 끼는 회색의 무언가들을 털어내고 나서야 김록수는 생각을 그만뒀다.
“이상하네, 진짜.”
아까 동아리 ‘길잡이’가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아까까지는 벗어나고 싶었다면 지금은 그곳에 다시 앉고 싶었다. 스스로의 변덕스러움에 김록수가 미간이 좁혔다
